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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칼럼 인터뷰

전자음악에 대한 숙의과정의 필요성

by KOCCA 2012. 9. 6.

 

전자음악에 대한 숙의과정의 필요성


권혁중 (작곡가/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방송학 석사과정)
 


‘아우라(Aura)’의 개념을 처음 밝힌 발터 벤야민은 1936년 에세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서두에서 ‘물질도, 공간도, 시간도 지난 20년 동안 예로부터 존재해왔던 그대로의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거대한 혁신이 예술의 모든 기술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발명 그 자체가 영향을 끼치고, 마침내 예술의 개념 자체를 놀라운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이르리라는 것을 예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paul valery의 글을 소개한다. 오래 전 벤야민이 소개하고 valery가 말한 거대한 혁신이 현재 음악예술에선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과학의 발전으로 탄생된 전자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디지털 예술은 과거에는 있을 수 없는 음악적 체계를 만들어 내고, 그 동안 듣지 못했던 소리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노이즈의 활용을 보라)
 

과학과 기술의 혁신이 전자음악이라는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 내고, 기존의 예술을 변화시킴으로써 음악자체에 영향을 끼치며, 마침내 음악 예술의 개념 자체를 놀라운 방식으로 변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전자음악은 다양한 예술문화로 변화가 가능하며 디지털 매체 예술로써 훌륭한 가치를 가진다. 그러한 이유로 혁신적이고 다양한 예술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자음악의 숙의과정’을 통한 전자음악을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동안 전자음악의 형태적 발전은 크게 이루어 졌으나 미학 담론에 대한 질적 연구는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자음악의 숙의과정’을 통해 – 철학자 이자 평론가인 벤야민과 비판주의 철학자 아도르노의 생각을 빌리고자 한다 – 전자음악의 깊은 내면을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숙의 과정의 첫 번째, 전자음악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 발견.

 

한류의 성장을 바라보면 그 안에 대중음악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2010년 이후 대중가요 제작에서 전자음악의 비율이 현저하게 높아졌다. 또 하나의 진보적인 변화는  전통적인 음계나 화음을 사용하지 않은 무 체계적인 음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노이즈(noise)를 활용하는 비중이 늘었다는 것이다. 한국 대중예술 및 음악의 트랜드를 미리 알 수 있는 ‘클럽 신’ 을 보면 그 현상은 뚜렷하다. 이젠 단순한 댄스음악이라기 보다 일렉트로닉 뮤직과 유럽에서 건너온 덥스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일렉트로닉 뮤직과 덥스텝은 신디사이저와 노이즈를 활용한 전자음악이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먼저, 신디사이저의 가장 큰 음악사적 의의는 전통적인 음악에서 사용하는 악기를 샘플링하여 똑같이 구현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알고리즘을 통해 이제껏 존재하지 않은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전통음악 미학에서 터부시(taboo)하였던 노이즈(noise)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음악적 범위를 확장시켰다. 이는 기존의 음악 질서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노이즈를 이용한 신디사이저 사용은 기존 음악 미학에서 중요시 하던 화음의 관습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새로운 기술적 발전으로 탄생된 신디사이저가 화음의 ‘아우라’를 상실하게끔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음악적 범위를 확장시킨 것이다.

 

▲ 신디사이저 YAMAHA S90ES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려대학교 허철교수는 그의 2010년 ‘에워싼 사운드’ 논문에서 ‘에워싼 사운드는 중심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난 배경(background)의 노이즈를 제공하며, 이때의 노이즈는 동기화(synchronized)되기보다는 접합(matched)됨으로써 이른바 해석의 강박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라고 하였다. 배경의 노이즈가 꼭 음악적 구조를 이루는 노이즈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제는 노이즈가 과거처럼 터부시 되는 것이 아니라 학자들의 연구소재가 될 정도로 중요한 미학 요소로, 또한 해석의 강박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전자음악은 전통적으로 사용 되는 화음과 멜로디의 규칙은 철저히 무시된다. 즉, 전자음악은 우리가 흔히 듣는 12음계가 아닌 새로운 음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듣는 대중가요는 기본적인 12음계를 사용한다. 그것은 도, 레, 미, 파, 솔, 라, 시와 그 사이에 반음들, 도#, 레#, 파#, 솔#, 라#를 합쳐 12음계라고 하는데, 전자음악은 그 음들이 아닌 그 사이의 음들까지도 사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 12음계가 아닌 500hz의 음을 사용하기도 하고, 때론 700Hz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음을 만드는 창작자의 의도대로 사운드가 제작된다. 고로, 음의 변형가능성을 열어두고 사운드를 제작하기에 정태적 존재라는 미적 논리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음의 변형가능성을 전제로 제작되기에 우리가 느끼는 원본(원음)에서 느끼는 미학적 담론보다 새로운 미학적 담론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원본인 회화에서 느끼지 않는 미적 담론을 복제된 사진에서 새롭게 느낄 수 있다는 벤야민의 생각을 깨닫게 해준다.
 

즉, 복제된 기술의 발전으로 탄생된 사진이 전통적인 회화의 ‘아우라’를 담아내지 않고도 새로운 미적 담론을 지니듯, 전자음악 또한 기존의 전통적인 음악에서 담아 낼 수 없는 미학을 담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전자음악은 앞서 말한 기존의 음계를 사용하지 않고 전혀 다른 소리 체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점점 변해가는 전자음악의 ‘물 신화’.

현재 숙의과정이 없이 형태적으로 발전되는 전자음악은 특히 대중가요에서 세대별 계층간의 이데올로기를 극렬히 드러낸다. 어느 순간부터 전자음악은 젊은 세대를 위한 사운드라는 편견이 생기게 되어 전자음악이 있는 곳은 젊은 세대들만 모이는 장소로 변하였다. 또한 그곳에서 젊은 세대의 문화가 발전되고 자리 잡히게 되었다. 문제는 많은 젊은 세대들이 이런 전자음악이라는 라운지에 한정되어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젊은 세대는 극렬한 사운드, 몸을 움직이게 하는 비트와 리듬, 몽환적인 주파수 대역에 매료되어 전자음악이 있는 곳에 모인다. 그들의 문화는 바로 ‘클럽 신’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켰다. ‘클럽 신’이란 Club과 Scene 이 합쳐진 신조어로 2010년 이후 전자음악을 즐기는 파티의 의미로 젊은 세대의 문화를 대표하게 되었다.

 

 

▲ 클럽 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화적 퇴색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자본의 힘이 전자음악의 클럽 신에도 들어와 ‘젊은 문화의 클럽 신’에서 ‘물 신화의 클럽 신’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다국적 담배, 주류 회사들의 클럽신의 진입이다. 대부분의 파티나 클럽 신은 젊은 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거대 다국적 기업의 술, 담배회사의 주최로 이뤄지고 있다. 기업들이 파티 비용을 지원하고, 그 파티에 모인 젊은 세대들에게 거대 자본을 활용하여 강력한 홍보효과를 누린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클럽 신에서 이뤄지고 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이러한 일례는 전자음악이 순수하게 하나의 뚜렷한 예술적 목적을 위해 발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만나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벤야민이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기술적 복제 예술은 다양한 변화를 거쳐 새로운 예술을 창조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즉, ‘아우라’의 상실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창달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초기 전자음악 클럽 신에서 젊은 세대의 문화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쉽게 인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에 의한 물 신화의 비판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제는 순수한 전자음악의 클럽 신 보다는 자본의 힘이 움직이는 클럽 신으로의 변화로 말미암아 그 예술적 가치가 비판의 대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때야 말로 전자음악의 다양성과 예술성을 지키기 위한 전자음악 예술가들의 비판적 사고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결론
 

전자음악의 더 큰 발전을 위해서 전자음악에 대한 숙의과정은 꼭 필요하다. 숙의과정을 통하여 첫째, 전자음악의 미학을 발견 할 수 있다. 새로운 사운드를 발견하기에 급급했지 왜 그 사운드가 아름다운지, 다른 예술문화에서 전자음악이 갖는 다양성과 중요성을 너무나 소홀히 해왔다. 둘째, 전자음악의 자본화로 점점 예술가의 비판주의적 사고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대중문화 속에서 전자음악은 하나의 장르음악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렇게 탄생된 것이 바로 독특한 클럽 신 문화이다. 이 클럽 신 문화를 통해 젊은 세대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세대별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하게 되었다. 즉, 벤야민이 말하는 것처럼 전자음악이 젊은 세대를 이끄는 클럽 신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냈듯, 하나의 복제된 디지털 예술이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아도르노의 물 신화의 비판도 적용될 수 있다. 순수한 전자음악의 클럽 신이 아니라 거대 기업들의 자본의 힘에 돌아가는 클럽 신으로 변화되어 젊은 세대들이 문화적, 예술적 다양성을 위축 받게 되었다. 이런 자본에 의해 변하는 클럽신의 회복을 위해서 아도르노가 말하는 비판주의 입장에서 예술가들의 지각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전자음악 예술가들의 비판주의적 사고는 자본화의 클럽 신에 저항할 수 있는 중요한 뿌리가 될 것 이다. 이런 전자음악의 숙의과정이야 말로 앞으로 전자음악이 새로운 디지털 예술로 발전하기 위한 초석이 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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