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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칼럼 인터뷰

애플-삼성의 특허 소송 공방과 작가적 리스펙트에 관하여

by KOCCA 2012. 9. 14.

 


애플-삼성의 특허 소송 공방과 작가적 리스펙트에 관하여

 
김국현 에디토이(editoy.com) 대표

 

애플과 삼성의 특허 공방. '잡스의 유훈 소송'이라 불리는 저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뿐만이 아니다. 자칭 아티스트라면 혹은 자신만의 콘텐츠를 지녀 본 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법 이전에 표절과 도용에 대한 감정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이 표절 혹은 도용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라는 것은 당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일 것.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휘두를 정도로 격해진 이에게 특허라는 제도가 그저 손에 잡힌 셈이었다. 게다가 삼성은 애플을 약 올리듯 자신만만 특허전선을 전세계로 파급시켜만 갔었다.

 


오리지널을 따지는 것이 아닌, 예술에 대한 리스펙트.

 

이 세상에 완전한 오리지널이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탄소를 만들지 않은 이상, 언어의 분절화를 창조하지 않은 이상 결국은 다른 무언가의 조합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인류는 그 '편집적 성과'만으로도 충분히 예술성을 느낄 수 있도록 진화되어 왔다. 그리고 이를 또 존중해 왔다. 마치 레고 블록으로 쌓은 예술을 칭송하듯이 말이다. 이미 어디에나 있는 블록이지만 어떻게 끼워 넣는지에 따라 다른 세계가 펼쳐졌고, 그렇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로 여겼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술이란 누구나 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그 조합에는 결국 이론상 가지수의 한계가 있다. 즉 내가 내일 만들 수도 있었던 대단한 무언가를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누군가가 멋들어지게 조합해 버리는 것. 그것이 작문이고, 작곡이고... 그러니까 작가의 영역이었다. 먼저 조합을 시도해 버리는 부지런함 혹은 운수, 예술의 조건은 그것뿐이다.


때로는 대가 없고 무모하기까지한 이 부지런함에 작가가 빠져드는 원인은 결국 단 하나. 리스펙트(respect)다. 존중, 존경, 경의, 이 어감에 딱 맞는 표현을 찾기는 힘들지만, "우와, 네가 지금까지 조합된 적 없는 새로운 퍼즐을 맞추었구나!"라고 인정해 주는 것. 이 리스펙트라는 행위가 인류를 늘 창조의 전방으로 밀어 붙였다. 금전적 보상은 그 뒤에 따라 오는 것이다.


글이든 그림이든 출판이나 공연과 같은 공개 행위를 하기 전에 가끔은 악몽이 떠오르곤 한다. 나도 모르게 어디선가 본 문장과 그림이 심층심리에 각인되어 마치 내가 창조해 낸 것 인양 쓰게 되면 어떻게 되나 하는 깊은 노파심 때문이다. 행여 사진 찍듯 탁월한 기억력을 지닌 작가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작곡가라면 음악을 듣는 것조차 겁이 난다. 만화가라면 만화를 보는 것조차 두려워지기도 한다.


남이 맞춘 퍼즐이나 다시 맞추고 있다면 그것을 들키든 들키지 않든 그걸로 작가로서의 존재는 끝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을 뚫고 탄생한 작품이라면 누구라도 그 작품이 그에 합당한 리스펙트를 받기를 바라게 되곤 한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 신경질적이었던 것만큼 타인에 대해서도 신경질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리스펙트를 받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저지르게 된다. 어쩌면 아이폰이 그들에게는 그런 물건이었다. 아이폰은 다른 모든 공산품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오리지널은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배심원을 포함한 대중은 그 작품성을 리스펙트했다. 그러나 오히려 작품을 표절한 이가 너의 작품 안에도 내 레고 블록이 들어 있으니 싸워 보자고 한 셈이었고, 그것이 애플-삼성의 희대의 소송공방이었다.


물론 순도 100%의 오리지널이란 있을 수 없다. 누군가의 아이디어에 내 아이디어를 더해 새로운 아이디어가 만들어지는 것 또한 인류 문명의 역사였다. 패션과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는 그 좋은 예다.


그렇지만 이 두 분야가 무엇에 지탱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그것은 리스펙트였다. 트렌디한 것과 '짝퉁'의 차이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하다. 리스펙트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짝퉁이 되었다. 오픈소스도 마찬가지다.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다고? 대신 이 체제에서는 리스펙트가 재사용의 전제 조건이다. 널리 퍼져 나간 소스의 원저자는 그렇게 전설이 되어 갔다.

 


지적재산권 그 이후를 생각해야 할 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적재산권의 존재의미는 의문스럽다. 기본적으로 아이디어가 재산이라 주장한다. 빌려 줬으니 가져 갔으니 돈을 내라 한다. 그러나 빌려줘도 가져가도 아이디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의 지적재산권이 리스펙트를 지키는 유일무이한 길일 리 없다. 리스펙트를 주고 받는 대신 청구항과 배상금액 산정이 거래된다.


그러나 원래 재산권이란 국가를 포함한 전제(專制) 정치의 폭력 장치로부터 개인의 존엄을 보장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 얼개였다. 그런데 지적재산권은 전제 권력의 폭력으로부터 약한 개인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이들로부터 기득권을 지닌 이를 보호하겠다 한다. 국가가 불특정 다수의 도전으로부터 이미 가진 자를 방어해 주는 특권인 셈이다. 게다가 이 재산은 소진조차 되지 않는다. 어딘가 이상하고 개운하지가 않다. 인류 역사적으로도 설득력이 약한 이 지적재산권은 다른 재산권과는 달리 개인이 지켜내야 할 최소한의 존엄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어느새 특허는 원래 발상 대로 발명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대신, 거대 기업이 끼리끼리 동맹 형성을 하기 위한 교섭용 소재로 전락했다. 또 저작권은 과도하게 보호되어 유족들의 불로소득 수단이 되어 가고 있다.


물론 의료나 제약과 같이 막대한 초기투자를 보전해서 인류 생존의 다음 단계를 위한 보조재를 만들어 낼 인센티브만은 지켜줘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가 너무나도 소박했던 ‘작품에 대한 리스펙트’를 지키고 싶었던 마음에까지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번 소송은 이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불러 일으키기 시작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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