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상발전소/칼럼 인터뷰

무너진 시장에서 떠오르는 LP의 새로운 가능성

by KOCCA 2012. 4. 26.

무너진 시장에서 떠오르는 LP의 새로운 가능성

 

 

천 학 주 (레코딩엔지니어, 밴드 스테레오베이 멤버)

 

2011년 11월, 라운드앤라운드가 기획하는 ‘서울 레코드페어'의 첫 번째 행사가 열렸다. 돈을 내고 입장해서 음반을 구매하는, 국내에서는 매우 생소한 형태의 행사였다. 게다가 주최자들 스스로가 밝힌 바와 같이 ‘그 어떤 나라보다 빨리 음악 시장의 디지털화를 이룬' 한국에서 이미 죽어버린 것과 다름없다고 여겨지던 매체 ‘음반'에 집중하는 행사가 열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실제 기획자가 아닌 입장에서 행사의 사업적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행사에 참가했던 대중들과 업계의 사람들은 대부분 눈으로 보여지는 성과들에 놀라워 했고, 최소한 가능성 그 이상을 보여줬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라운드앤라운드는 올 여름에 열릴 서울 레코드페어의 2회째 일정을 내 놓았다.


다양한 장르의 레이블들과 다양한 성향의 개인들이 참가해 음반을 전시하고 판매했던 1회 서울 레코드페어에서 단연 눈에 띄었던 부분은 바로 LP들이었다. CD들 만큼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 많은 LP들이 전시되었고 관람객들 역시 LP들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 정도의 가치만을 부여하고 말기에는 그 관심의 정도가 결코 적지 않았다. 이렇듯 급속히 디지털화 된 음악 시장에서 언제부터인가 다시 아날로그 매체의 상징과도 같은 LP가 대중들에게 재조명 받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붕괴되어버린 음악 시장에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음반 매체인 LP가 가지는 새로운 가능성을 짚어보고자 한다.

 

 

음반의 가치 변화 - 감상용에서 소장용으로

현재의 음악 시장은 CD가 음반매체의 주류를 이루던 시기를 지나 MP3파일 다운로드 위주로 재구성 되었다. 이로 인해 지금의 대중들은 이제 굳이 물리매체를 이용해 음악을 감상할 필요가 없어졌다. 소수의 오디오 마니아들을 제외하면 음악 자체를 즐기는 소위 ‘헤비 리스너'들 마저도 컴퓨터로, MP3 플레이어로, 그리고 휴대폰으로 음악을 감상한다.


집집마다 있던 ‘오디오'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며, 가방 안에 넣고 걸으면서 들어도 CD가 튀지 않는 ‘안티 쇼크'기능에 열광하던 휴대용 CD 플레이어 역시 이젠 영화 속에서 관객들의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소품으로 이용될 뿐이다. 대중들은 10여 년의 시간에 걸쳐 재편되는 음악 시장의 흐름에 적응해 가고 있었으며, 그나마 CD를 재생할 수 있는 도구로써 가장 마지막까지 대중들 곁에 남아있었던 컴퓨터의 CD 드라이브 마저도 USB 메모리 등 더 작은 크기에 더 큰 용량을 가진 저장 매체들에 밀려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이로써 이제는 대중들이 CD로 제작된 음반을 듣고 싶어도 재생할 도구가 없어서 듣지 못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되어 버렸다.

 

물리 매체의 비중이 줄어들고, 온라인 다운로드 형태가 주를 이루는 것으로 음악 시장이 변화한 가운데, 음악과 음반을 소비하는 대중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개념이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소장용'의 개념이다.

대중들은 듣고 싶은 곡의 파일을 다운로드 하는 것 만으로 실제로 그 음악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까지 해소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그 숫자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대중들은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더욱 편리한 방법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CD를 구입했다. 이 지점에서 대중들에게 ‘내가 구입한 이 음반을 재생할 수 있는가?’하는 고민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음반의 존재 이유는 단지 음악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 즉 감상용이 아닌 ‘소장용'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음반을 구입하는 대다수의 대중들은 단순히 음악을 듣기 위해서만 음반을 구입하지 않는다. 이제는 ‘과연 이 앨범이 소장가치가 있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소장가치’라는 것은 음악과 음악가 자체만으로 충족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음반 기획사들은 음반에 수록되는 음악의 퀄리티에 공을 들이는 것은 기본이요, 커버의 디자인과 음반의 패키지, 심지어는 추가로 제공되는 구성품들까지 다양한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다.


이렇게 ‘소장가치'의 개념이 새롭게 등장한 가운데 CD에 밀려 사라지는 것 만 같았던 LP가 음반 매체로써 몇 가지 경쟁력을 드러내고 있다.

 

 

<영국 밴드 Radiohead는 최근의 앨범 ‘The King of Limbs (2011)’를 MP3, WAV, CD, 10” 레코드 등 총 네 가지 포맷으로 동시에 공개했다. 특히 10” LP에는 음반 외에도 다양한 아이템들이 포함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소장용 음반으로써 LP의 매력

음악을 소비하는 대중들에게 음반의 사이즈가 크다는 것은 의외로 매력적인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LP의 커다란 크기는 소장용 매체로써 큰 장점이라 볼 수 있다. 한 면이 12인치나 되는 정 사각의 커다란 LP 커버는 우선 크기에서 부터 CD를 압도하는데, 대중들은 12센치의 CD보다는 12인치의 LP 커버에서 하나의 작품으로써 앨범 아트웍이 가져다주는 심미적 만족감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미국 밴드 Converge의 ‘Jane Doe (2001)’ 앨범. LP와 CD의 크기를 비교해 본다면 아트웍의 느낌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음악을 중요시 하는 음식점이나 바에서 LP가 인테리어 소품으로 많이 사용되는 이유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보통 LP라고 한다면 검정색의 커다란 원형을 떠올리지만 언제부터인가 다양한 색상의 LP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검정색 LP 자체도 충분히 고전적인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요즘의 LP는 소수의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두 세가지 색상으로 다양한 한정반을 내 놓음으로서 대중들의 소유욕을 더욱 자극하기도 한다. 심지어 앨범의 커버나 또 다른 이미지를 아예 LP판에 인쇄해 버린 Picture Disc나 투명한 소재의 Clear Disc도 대중들에게 소장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A면과 B면이 나눠질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활용해 각각의 면을 다른 음악가들이 채운 ‘Split 앨범’을 발매하거나, LP 사이즈의 1/3정도 밖에 되지 않는 7인치 판을 활용해 싱글이나 이벤트성 앨범을 발매하는 것은 오래 전 LP가 대세이던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홍보 방법들 중 하나이다.


이렇듯 LP는 규격과 용량이 정해져 있는 CD에 비해 다양한 프로모션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어 음반 기획자들과 음악가들에게도 큰 매력을 가진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1) The Smiths와 Bane의 픽쳐 디스크. 일반적으로 A면에는 앨범 아트웍, B면에는 수록곡 리스트를 프린팅 한다.
2) 일본밴드 8 otto와 Lostage의 스플릿 싱글앨범. 한 면에 한 곡씩 두 밴드가 각각 수록했다.
3) 다양한 색상의 7” 레코드 들. 모두 적게는 100장에서 500장 정도의 한정 발매반들이다.
4) 미국 밴드 Another Victim은 이벤트성 앨범을 5” 레코드로 한정 발매했다. CD와 비슷한 크기지만 Vinyl 음반이다.>

 

 

물론 아무리 ‘소장용'인 음반이라고 해도 들을 방법이 없다면 음반으로써 포지션이 모호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날 LP 타이틀을 발매하는 대부분의 음반사들은 LP 구매자들이 턴테이블을 소유하지 않았더라도 해당 음반을 감상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들을 함께 제공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흔한 방법으로는 홈페이지를 통해 구입한 음반의 음원을 다운로드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 놓는 것인데, LP 구매 후 포함된 시리얼 넘버를 홈페이지에 입력하면 구매자의 PC로 음원을 다운로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시스템을 구축하기 어려운 인디 레이블의 경우에는 LP에 CDR을 함께 동봉해 판매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정식 CD 타이틀과 함께 패키지로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아날로그 매체인 LP의 생명력을 위협하는 존재로 음악 시장에 나타났지만, 결국 오늘날은 LP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도구가 되어주고 있기도 하다.

 

 

<영국의 팝 듀오 HURTS의 독일반 LP는 CD와 패키지로 발매 되었다. (좌), 미국의 인디 밴드 Heiress는 7” 싱글 음반에 수록된 곡을 CDR로 구워 함께 제공했다. (중), 미국의 Kanine 레코드, 영국의 Domino 레코드에서 발매된 LP에 포함되어 있는 무료 MP3 다운로드 카드. Domino 레코드는 WAV형태의 파일도 다운로드를 지원한다. (우)>

 

 

이렇듯 더 이상 LP는 추억을 찾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늘날의 LP는 음악가들이 추구하는 음악 외적인 부분의 예술성마저도 극대화 시켜줄 수 있는 음반 매체이자, 음반사들의 프로모션 기획을 좀 더 용이하게 해 주는 도구이다. 그런 점에서 LP하면 흔히 떠올리는 ‘아날로그’, ‘향수’, ‘감성' 등과 같은 키워드들은 오늘날 서서히 그 영향력을 다시 찾아가고 있는 음반 매체로써 LP를 설명하는데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얼마 전 한국에도 다시 LP 공장이 문을 연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동안 LP를 만들기도, 구입하기도 어려웠던 국내 음악 시장에서 다시 등장할 이 새로운 도구를 어떻게 활용할 것 인가는 이제 음악가들과 음반사들, 그리고 대중들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