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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칼럼 인터뷰

사라진 드라마를 그리워한다.

by KOCCA 2012. 4. 22.

 

 

사라진 드라마를 그리워한다.

 

 

이 용 석 (SBS 드라마 PD)

 

많은 사람이 한국 드라마의 전성기가 찾아왔다고 얘기한다. 우리 드라마가 한류를 타고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비판의 소리도 많이 들린다. 그 비판은 주로 우리 드라마의 제작 실상을 아는 내부인의 목소리인데 다음과 같다. 우선 TV 드라마에서 갈등과 전쟁의 국면에 집중하느라 용서와 화해의 미덕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드라마의 산업적인 측면을 강조하느라 공공(公共)의 의무를 게을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후진적이고 급하기만 한 제작 관행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스타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동안 스태프들과 조단역 배우들은 소외 계층의 피곤함에 절어 있다. 무엇보다 필자는 한국 드라마에서 다양하고 다원적인 모습이 사라진 것이 가장 아쉽다. SBS의 ‘뿌리 깊은 나무’나 MBC의 ‘해를 품은 달’ 등 사극에서 새로운 소재가 발굴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드라마의 포맷이나 편성에서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런 발전은 금세 답보상태에 이를 것이다. 변화와 다양성을 안아 줄 그릇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 드라마는 과거 ‘사라진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을 때 더욱 황금기를 누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산업과 자본의 논리 이전에 예술적인 성취와 사회적 공익을 추구하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그래서 아쉬운 드라마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 80년대에 테마 드라마란 것이 있었다. 시청률을 가늠하지 않던 시기였기에 환경문제, 천연기념물 보호 등 주제의식이 강한 드라마를 만들어 사회적인 논제를 제기했던 드라마이다. 환경문제, 노동문제, 산업과 경제, 근현대사의 정치적 이슈 등 드라마가 단순히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저널리즘이었음을 보여준 작품들이었다. 2부작에서 4부작의 특집극으로 편성되곤 하였으나 현재 그 명맥은 시청률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주제의식이 강한 드라마가 제작되지 않기에 TV 드라마를 통한 환경 감시의 기능이나 계도적인 미디어의 역할은 이제 거의 포기한 것이다.

 

둘째, 어린이 드라마가 있었다. 7,8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고 90년대에도 KBS의 ‘매직키드 마수리’, ‘요정 컴미’ 등 어린이 드라마가 다시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어린이의 방과 후 학습 등으로 시청행태가 변했다고 보아 적당한 편성 시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이 드라마는 비교육적 방식으로 어린이를 교육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또한, 동심이라는 공감대를 포착한다면 해외 드라마 수출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도 있기에 어린이 드라마의 취약함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셋째, 주 일 회 방송되는 시추에이션 드라마들이 사라졌다. MBC의 ‘종합병원’이나 SBS의 ‘박봉숙변호사’ 등 시추에이션 물이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시추에이션 드라마는 드라마에 전문적인 소재를 끌어들이기 좋다. ‘전원일기’,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처럼 농촌, 전원을 무대로 하였고, 최근 MBC에서 시즌드라마란 이름으로 ‘미술 경매’, ‘보험조사팀’, ‘성형외과’의 세계를 다룬 것처럼, TV 드라마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시간이다. 특히 단막극과 더불어 신인작가, 신인연출의 훈련의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시추에이션 물은 제작대비 효용이 좋지 않다는 경제 논리에 휘말려 그 자취를 감추고 있다. 명맥을 잇는 것은 KBS의 [사랑과 전쟁]인데, 이 드라마가 과거의 시추에이션 물처럼 전문성을 담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넷째, 단막극이다. KBS의 문예극장, TV문학관, 드라마 스페셜 등으로 명성을 이어왔고, MBC의 베스트셀러 극장, 베스트 극장, SBS의 70분 드라마, 오픈드라마 남과 여가 단막극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단막극은 한 회를 통해 극의 완성도를 추구함으로써 TV에서 영화적인 재미를 얻는 융합의 장르였다. 또한, 신인작가와 연출자, 연기자, 스태프진의 등용문으로서 드라마의 선수층을 두껍게 한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현재 한국 콘텐츠 진흥원 등 외부의 지원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그나마 외부 수혈이 끝나면 곧 사라질 전망이다. 오늘 시청률 40%의 인기작이 나오지만, 반대로 5% 미만의 시청률에 품질이 좋지 않은 드라마가 공존하는 것은 단막극을 통해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제작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단막극의 실종은 한국 TV드라마에서 새로운 시도와 변화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과 같다.

 

사라진 드라마들은 우리 드라마의 다양성을 대변하는 시간이었다. 그 실종으로 우리는 오직 시청률을 향한 맹목적인 드라마를 보게 되었고, 철학과 주제, 그리고 품격을 찾기 어려워졌다. 시장과 경제의 논리가 방송사를 지배하게 된 지금, 이 사라진 드라마를 되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동안 한국 드라마는 그 화려함이 계속될 테지만 그것이 얼마나 건실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생물 종(種)의 다양성이 사라진 생태계가 멸종과 파괴의 국면이 빨리 찾아오는 것처럼, 다양성과 새로운 시도가 없어진 드라마 콘텐츠는 곧 열성 유전자가 두드러져 부실해질 것이다. 한류라는 화려한 성과에 도취되어 있을 때, 우리 드라마의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점검해 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