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석 / 코믹챔프
“국문학도가 무슨 만화를 보냐!”
대학시절 이봉석 편집장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문학의 길’에 매진하는 선후배 사이에서 늘 그의 손에는 만화책이 들려있었다. 누구에게는 유명 시가 그리고 소설이 고전의 반열에 올랐겠지만 그에게는 만화가 유명 고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출판되기를 간절히 고대했고, 적은 용돈이지만 주저 없이 투자했다.
만화를 즐겨보던 국문학도, 만화편집기자가 되다
신문광고의 만화편집기자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해 덜컥 합격해버렸다. 처음 그가 입사를 했을 때가 1997년이니 만화출판업계에 발을 들인지도 벌써 14년째. 오직 ‘열정’만으로 달려들었던 신입을 거쳐 지금은 코믹챔프의 편집장이다. 그는 만화의 부흥기와 침체기를 한 몸에 겪은 산증인이기도 하다. 편집기자로서 숱한 만화를 기획하고, 작가를 대면하고, 책을 만들며 지나온 시간이 곳곳에 자리한다.
“제가 막 입사했을 때만 해도 만화가 부흥을 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만화방을 중심으로 만화가 읽히던 풍토에서 만화 주간지도 많이 나오고, 단행본도 많이 팔렸죠. 그래서인지 당시에 주간지 편집기자로, 작가의 화실과 회사를 동분서주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던 것 같아요. 이제 그 일을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하겠지만……(웃음).
편집기자는 간단히 말해 작가의 매니저와 같다. 기획 단계부터 서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그것을 토대로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간다. 1,2회분 정도의 결과물이 나오면 편집팀 회의를 거쳐 연재가 최종 결정되고, 그때부터 편집기자는 작가 관리에 들어간다. 매번 말썽을 일으키는 원고 마감을 관리하고, 원고의 상태와 오탈자를 수정하며, 책이 나올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편집기자는 작가의 원고가 책으로 만들어질 때까지 통괄하는 사람이에요. 중간에 수없이 발생하는 변수를 잘 통제해야합니다. 무엇보다 마감이 항상 최대의 걸림돌인데요, 주간지의 경우 어김없이 그 날 책이 나와야 하고 대수도 신경 써야 하니까. 한 작품만 빠져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죠. ‘피가 마른다’는 상황이 바로 그 같은 경우죠. 작가가 잠적이라도 하면, 골치가 아프죠.”
이봉석 편집장인 처음으로 작가와 합심해 만든 작품 <웨스트 샷건>, 그리고 그 후속작 <다크에어>
마감을 압박, 작가와 편집기자의 애증
편집기자의 최대 적은 작가다. 더구나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가들을 관리하는 편집기자는 마감 날은 항상 고욕. 지금이야 웹하드를 통해 원고의 피드백이 오가지만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마감 날 아쉬운 기자가 화실을 직접 방문해 작가와 함께 밤을 새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원고 마감이 당일인데, 화실을 찾으니 하얗게 된 백지가 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어요, 곧 끝난다는 만화가 시작도 안한 거죠. 편집장의 독촉전화는 계속되고, 정말 사람이 미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요. 근데 어쩌겠어요. 일단 작가를 다독이고 원고를 끝내야 하니까. 결국 같이 몇 밤을 꼬박 새고, 인쇄 당일 필름을 끼워놓는 경우가 부지기수죠.”
허나 이런 일들도 옛일이라 이 편집장은 말한다. 웹툰이 활성화되고, 작가 스스로 만화를 창작하고 독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시스템이 생기다보니, 종이 만화에 대한 수요도 옛날 같지 않다. 회사로 온 정성스런 팬레터를 작가에게 전달해주기도 하고, 책의 증세를 작가에게 챙겨주기도 했던 시절의 감흥은 이제 손에 꼽힐 정도. 물론 요즘은 댓글로 작가와 독자가 직접 소통하는 문화다보니, 만화를 즐기는 세대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고.
“점점 만화를 보는 세대의 특징도 많이 바뀌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종이를 넘겨보는 맛이었다면 요즘 세대는 스마트폰, 태블릿 그리고 PC로 만화를 보잖아요. 딱히 ‘만화가 종이가 아니면 안된다’는 인식은 많이 사라졌죠.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인쇄된 만화책도 하나의 고급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에요. 만화책의 수요가 줄어드는 현실이 조금은 안타깝죠.”
기자시절 마감전쟁을 치뤘던 대표적인 작품 <프리스트>, <점핑>
변화하는 만화 플랫폼, 기회는 있다!
침체되고 있는 만화출판업계지만 그래도 기회는 있다고 이 편집장은 말한다. 점점 시장이 커지고 있는 온라인 모바일 시장이 그것. 현재 그쪽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상태기도 한다. 물론 대형 포털을 중심으로 ‘무료만화보기’ 대세긴 하지만, 돈을 주고 만화는 보는 사람도 늘고 있는 추세. 불법스캔에 무감각했던 사회적인 인식도 점차 바뀔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현재 상황은 과도기적인 것이라 생각해요. 출판시장이 열악한 대신, 모바일이나 온라인 시장이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만화의 인기가 시들었다고 해도, 만화를 보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대신 무료로 보는 것에 익숙해서죠. 나중에 만화의 유통시스템이 재정비 된다면 기회는 올 것이라 생각해요. 그 때까지 좋은 콘텐츠 만들 것입니다. 그것이 저희의 향후 재산이죠.”
한편으로 만화의 2차 콘텐츠화가 보편화되는 것도 좋은 분위기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무사 백동수도 만화를 토대로 제작되고 있고, 그 외 만화가 드라마, 영화 등으로 제작되는 일이 늘고 있는 것. 단순히 ‘만화’에 머물지 않고, 해당 만화가 2,3차 산업으로 확장할 수 있는 ‘모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그런 움직임이 활성화됐다고는 보기에는 이르죠. 대단히 극소수니까요. 특히 한국은 그런 부분이 더 열악하죠. 애니메이션이나, 캐릭터 산업만 봐도 여전히 한국은 불모지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확실한 고객층도 없다 보니, 스폰서가 잘 붙지 않거든요. 아직까지 정부의 지원 없이는 힘든 분야입니다.”
앞으로도 나는 ‘만화편집기획자’다
이 편집장은 작가들과 지지고 볶으며 만든 작품이 반응이 좋을 때 가장 기쁘다. 대박은 아니나 하더라도 증세가 들어왔을 때 작가들에게 면목도 선다. 그렇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작품은 <웨스트 샷건>이다. 고생한 보람이 독자의 반응으로 나타날 때 더 없이 보람된다고. 더구나 현재는 그런 일이 훨씬 드물다보니 ‘증세’는 굉장히 신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시장의 상황이 안 좋다 보니 요즘은 신입 편집기자들 뽑기도 녹녹치 않아요. 제가 신입 때만 하더라도 잡지가 한 두 개씩 생기곤 했는데, 지금은 늘어나지 않으니, 누군가의 공석이 생기지 않고서는 인원을 새로 들이기 힘들죠. 그리고 새로 들어오는 인원도 찾기 힘들어요. 시장이 좀 커졌으면 좋겠는데…….
가끔 친구들은 힘들다는 그의 말에 배부른 소리한다고 핀잔을 준다. “만화 읽으면서 월급 받는 얘가 무슨?” 그렇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사실 푸념은 있지만 일이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 그다. ‘예술끼’가 넘치는 작가를 직접 맞대고 산다는 것 자체가 그는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되도록 오래 이 업계에 머물고 싶다. 새롭게 만화가 부흥할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그는 만화를 본다.
이봉석 편집장이 주간하고 있는 <코믹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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