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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칼럼 인터뷰

애니메이션의 인문학적, SF적 배경 설정 (3):최신의 학설이나 시사 사건을 도입한 애니메이션 작품

by KOCCA 2012. 8. 4.


애니메이션의 인문학적, SF적 배경 설정 (3)
:최신의 학설이나 시사 사건을 도입한 애니메이션 작품


선 정 우 (출판기획사 코믹팝 대표, mirugi.com 운영)
 
  

■ 다양한 애니메이션 작품의 사례
『프랙탈』의 경우에는 원안 담당으로 평론가로 유명한 학자 출신의 소설가 아즈마 히로키를 직접 기용했다는 특이성이 있다 보니 길게 다뤘으나,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이 새로운 학문적 경향을 도입하거나 최신의 과학적 연구 결과, 혹은 국제 관계의 변화 등을 다룬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다. 거슬러 올라가면 로봇애니메이션 『마징가 Z』에서 악역인 닥터 헬이란 인물은 미케네인의 고대 유적에서 발굴한 로봇을 이용하여 세계 정복을 노린다.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미케네에서 기원전 1600~1100년경에 발달한 문명인데, 1952년에 미케네 왕궁, 1971년에 문자가 기록된 점토판 등이 발굴되었다. 『마징가 Z』 애니메이션은 일본에서 1972년 12월 3일부터 방영되었으니, 1971년의 점토판 발굴 뉴스를 비롯한 미케네 문명에 관한 정보가 작품에 반영되었으리라 짐작된다. 1979년 4월 방영된 『기동전사 건담』은 또 어떤가? 이 작품의 시작은 우주에서 지구로 ‘스페이스 콜로니’를 낙하시켜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스페이스 콜로니의 개념은 1969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 교수 제라드 오닐이 제창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는데, 1974년 뉴욕타임즈 신문에 게재되면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오닐 교수의 저서 『우주식민섬─1990년 완성 “제 2의 지구” 계획』이 일본에 번역 출판된 것은 1977년이다. 그로부터 단 2년만인 1979년 4월 『기동전사 건담』에 이 스페이스 콜로니(우주식민지) 개념이 도입된 것이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다.


 

 - 일본에 실제로 제작된 초대형 ‘건담’의 모형.

 

뒤의 건물들이나 로봇 발치에 보이는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다. 이 거대한 모형이 부분적으로나마 움직이기도 하고, 매우 리얼하게 건조되어 일본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촬영:임영웅)

 


최근에도 이런 경향은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2011년 4월 방영된 애니메이션 『C』는, 초능력이나 로봇을 통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돈’을 무기로 싸우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인간의 ‘미래’를 담보로 거액의 돈을 융자해주는 수수께끼의 단체로부터 받은 돈을 바탕으로, 마치 기업간의 적대적 M&A(인수 합병)처럼 보이는 전투를 행한다. 전투의 승패는 최종적으로 얻은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여 총자본이 얼마나 증감되었는지로 정해진다. 만약 총자산이 0 이하로 떨어지면 ‘채무 초과’가 되어 파산=파멸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 인물이 담보로 잡혔던 ‘미래’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2008년 9월 투자회사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방아쇠가 되었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2007년 서브프라임론 문제를 발단으로 미국 주택 경기의 ‘버블(거품)’이 붕괴하면서 리먼브라더스가 그 직격을 받아 2008년 파산한 ‘리먼 쇼크’ 이후 시작된 세계금융위기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교수가 2009년 ‘제 2차 세계 공황’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특히 수출 주도의 경제를 통해 성립되어 있던 일본이 받은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그런 분위기가 애니메이션 『C』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작품 제목인 ‘C’란 채무 초과로 파산하는 인간의 규모가 매우 클 경우 국가 단위로 ‘미래’가 사라져 한 나라 전체가 없어지는 것을 뜻하는데, 리먼 쇼크와 함께 국가 채무가 인류 역사상 최고 수준이라는 일본의 현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인다.

국제적인 정황을 반영하는 작품도 적지 않다. 2002년 10월 방송 개시되어 높은 인기를 끈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SEED』는, 후속작으로 2004년 10월부터 시작된 『기동전사 건담 SEED DESTINY』와 함께 당시 미국의 이라크 전쟁 문제를 의식한 작품이었다. 작품의 프로듀서가 인터뷰에서 “반전을 테마로 하고 있다”, “재선을 이룬 미국 부시 대통령”, “점점 더 혼미해져가는 이라크 정세” 등의 발언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시청자가 세계정세를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6년 10월 방송 개시된 『코드 기어스─반역의 를르슈』는 세계의 초대국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아메리카 대륙에 위치)에 점령당해 식민지가 된 일본, 그리고 유럽 대륙에 위치한 E.U.(유로 유니버스), 중국 대륙에 위치한 중화연방 등이 패권 다툼을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2011년 10월 시작된 『UN-GO(안고)』라는 작품은 얼마 전 국내 일부 매체에서 ‘거북선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휘’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기사를 써서 화제가 되었는데, 실제로는 1940년대 패전 이후 일본에서 천황 비판이나 패전을 직시하자는 등의 주장을 펼쳐 ‘무뢰파’로 분류되었던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의 작품을 바탕으로, 근래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테러 조직의 민간인 납치 문제나 신흥종교단체 등 다양한 문제를 그리고 있다.

 


 - 애니메이션 『UN-GO(안고)』의 극장판 영화인 『UN-GO episode:0 인과론』
(2011년 개봉/미즈시마 세이지 감독). (C)「UN-GO」製作委員會
 

 

■ 현실과 애니메이션의 상호 작용
이런 작품들은 전부 현실의 시사 문제나 최신의 과학적, 학문적 성과를 반영하여 만들어졌다. 반대로 애니메이션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일도 드물지 않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국내에도 일본에서 로봇 공학자들이 『철완 아톰』(국내 제목 『우주소년 아톰』)을 보고 로봇을 만들고 싶어 했다든지,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킨 『겨울 연가』의 각본가들이 애니메이션 『캔디 캔디』(국내 제목 『들장미소녀 캔디』)의 영향을 받았고 그 『캔디 캔디』를 비롯한 일본의 ‘소녀만화’(일종의 순정만화)는 영미권의 로맨스소설을 필두로 한 소녀소설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점 등…. 지난 2008년에 일본에서 로봇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국제건담학회’를 창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때 1만 명이 넘는 학회 참가 지원자가 몰리는 바람에 물리적으로 운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너무 커져서 중단된 사례도 있었다. ‘국제’ 학회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그때 필자에게도 참가 의뢰가 들어왔었는데, 그밖에도 사회학자나 건축공학자, 경제학자 등이 참가하여 『건담』을 학문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이 글의 1회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식으로 작품과 사회가 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는 구조에 관해서는 굳이 필자가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기본적인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언급되는 사례가 워낙 구태의연한 『아톰』『건담』에 머물러 있는 관계로, 2000년대 이후, 특히 2010년대의 최신 사례를 ‘업데이트’해보려는 것이 본고(本稿)의 목적이다.
 
서양 애니메이션에도 물론 현실은 반영되고 있다. 이란인 만화가가 만든 만화를 원작으로 작가 본인과 프랑스인 연출자가 공동 감독한 프랑스·미국 합작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라든지 2009년 골든글로브상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인 독일·프랑스·이스라엘 합작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 같은 사례가 있다. 현실 풍자를 중심으로 하는 『심슨 가족』(1989년부터 방영)에는 시사적인 문제도 자주 다루어진다.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 압도적인 제작편수=물량에 의해 다양성이 담보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동이 아닌 청소년을 대상으로, 상대적으로 시청률에 대한 부담이 적은 심야 시간대의 TV애니메이션 및 제작비 회수 방법을 다양하게 고려할 수 있는 극장 애니메이션 등에서는 색다른 시도가 자주 이루어진다. 그 와중에 최신의 과학적, 학문적 성과를 반영한 스토리나 배경 설정이 다양하게 도입되는 것이다.

 

- 왼쪽부터 『페르세폴리스』(2007년 개봉/마르잔 사트라피·뱅상 파로노 감독), 『바시르와 왈츠를』(2008년 개봉/아리 폴먼 감독), 『심슨 가족 더 무비』(2007년 개봉/데이비드 실버맨 감독)의 포스터.


국내에서도 애니메이션 제작이 좀 더 다채널화되고 다양화될 수 있다면 다양한 창작자들이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1년 『마당을 나온 암탉』과 『돼지의 왕』이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두 작품이 동 시기에 개봉되어 각각의 위치에서 호평을 받은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돼지의 왕』의 연상호 감독은 저예산의 독립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이 유효하다고 믿었고 그것을 실현시켰으며 부산국제영화제 수상과 칸 국제영화제 초청이라는 성과도 얻었다. 그 성공을 바탕으로 앞으로는 또 다른 방식의 한국 애니메이션이 시도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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