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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칼럼 인터뷰

애니메이션의 인문학적, SF적 배경 설정 (2):애니메이션 『프랙탈』로 보는 ‘라이프로그’②

by KOCCA 2012. 7. 1.

애니메이션의 인문학적, SF적 배경 설정 (2)
:애니메이션 『프랙탈』로 보는 ‘라이프로그’②

 

선 정 우 (출판기획사 코믹팝 대표, mirugi.com 운영)


지난 회에 이어, 애니메이션 『프랙탈』이 도입한 미래학적인 설정에 대해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번에는 블로그, SNS 등을 포괄하는 용어로 국내에서도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사용되었던 ‘라이프로그’라는 개념에 대해서다.


【『프랙탈』 애니메이션 DATA】
- 전 11화
- 2011년 1월~2011년 3월 일본 방영
- 한국에서는 케이블TV, IPTV 등에서 애니플러스 채널로 방영
원작:만델브로 엔진 (야마모토 유타카, 아즈마 히로키, 오카다 마리의 그룹명)
원안:아즈마 히로키 (대표작 평론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소설 『퀀텀 패밀리즈』)
감독:야마모토 유타카 (대표작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연출, 『칸나기』 감독)
시리즈구성: 오카다 마리 (대표작 『토라도라!』『방랑소년』『그 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린 아직 모른다.』『블랙★록 슈터』 시리즈구성)
캐릭터디자인: 타시로 마사코
애니메이션제작:A-1 Pictures

 

- 애니메이션 『프랙탈』(2011년 방영/야마모토 유타카 감독)의 포스터. (C)フラクタル製作委員會


■『프랙탈』과 라이프로그(lifelog)
‘라이프로그’란 인간의 생활을 디지털 데이터로 기록하는 행위, 혹은 그 기록 자체를 뜻한다. 블로그(blog)라든지, 휴대전화의 GPS 기능을 통한 위치 정보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기록하는 것 등이 현재 실현되어 있는 라이프로그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더 확장한다면 개인이 매일매일 어떤 것을 먹었는지 사진 등으로 기록하는 푸드로그(foodlog)라든지, 본인이 읽은 책, 들은 음악, 시청한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기록하는 것도 라이프로그라 할 수 있다. 일견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된 정보 같지만, 이런 라이프로그를 디지털화하여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면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시기 어떤 지역에 거주하는 어느 정도 나이의 인물의 삶이 정확하게 검색되고 통계지어질 수 있다면, 그 시대의 생활사(史)를 정확하게 살펴보는 일이 가능해진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라이프로그가 데이터베이스로 이용 가능해진다면 광고 분야에 있어서 혁명과도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미국과 일본에서 일반적인 온라인서점인 아마존(amazon)은 개인의 구입 및 검색 내역을 자동적으로 분석하여 그 사람이 사이트에 재방문할 때 ‘최근 체크한 상품과 관련된 또 다른 상품’이나 ‘최근 검색한 상품을 구입한 다른 사람들이 같이 구매한 상품’을 보여주는데, 이런 것이 라이프로그를 시스템에 도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라이프로그가 인류 전체로 확대된다면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경제 형태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논의가 존재하는데, 『프랙탈』은 그런 최신 개념을 즉시 도입하여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 온라인서점 아마존 사이트에는 이런 식으로 컴퓨터 사용자의 검색 내용을 바탕으로 자동 추천 상품이 리스트로 표시된다. 필자가 애니메이션 『UN-GO』를 검색했더니 추천 상품으로 『UN-GO』 애니메이션 관련 서적과 영상 상품, 그리고 『UN-GO』의 원작자인 사카구치 안고의 책이 나왔다. 그 아래에는 필자가 며칠 전에 일본의 철도 관련 CD를 검색했기 때문에 비슷한 CD를 ‘관련 상품’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프랙탈』의 배경 설정은 원안 담당의 아즈마 히로키가 이미 2006년에 소설가 사쿠라자카 히로시(대표작 『All you need is kill(올 유 니드 이즈 킬)』) 및 전자화폐·지역통화·정보사회학 등을 전공한 연구자 스즈키 켄과 공동으로 시도했던 소설과 설정으로 이루어진 엔터테인먼트 기획 『기트 스테이트(GEET STATE)』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었다. 『기트 스테이트』는 환경 관리형 권력이 전면화된 2045년의 일본 사회를 예측해보자는 일종의 ‘미래학과 엔터테인먼트의 융합’을 목표로 했던 프로젝트인데, 이 작품을 필두로 애니메이션 『프랙탈』의 설정, 2010년도 미시마 유키오 상을 수상한 소설 『퀀텀 패밀리즈』, 그리고 2011년에 발표한 정치와 사회의 미래상을 그려낸 철학서 『일반의지 2.0』에 이르기까지 아즈마 히로키는 일관되게 현대의 인류가 거둔 기술적 성취와 경제·사회적 상황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자 했다. 그것은 SF이기도 하고 인문학이기도 하며 결과적으로는 말 그대로 ‘철학’인 것이다. 그런 철학을 애니메이션에 도입한 작품이 『프랙탈』이라 할 수 있겠다.


■ 나노머신과 ‘세뇌’의 공포
애니메이션 『프랙탈』에서는 나노머신을 통해 전 세계 인류의 ‘라이프로그’를 담당하는 프랙탈 시스템이란 것을 ‘네트워크로 구성된 계산기 수 조 대의 총체’라고 하여 국가나 특정 기업으로부터 독립된 듯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앞서 언급한 온라인서점 아마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이 라이프로그는 현재로선 기업이나 광고 등 자본주의 사회와 결합되어 있다. 2009년도에 개봉된 제라드 버틀러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게이머』에는 가상공간의 캐릭터(아바타)로서 실제 인물을 직접 조종한다는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내용이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소사이어티’라는 일종의 온라인게임은, 가상공간의 게임 캐릭터를 조종하는 현재의 온라인게임과는 달리 조종하는 객체가 실제 인간이라는 차이점을 갖고 있다. 조종당하는 인간은 ‘나노머신’이 심어져 있어 게임회사가 소유한 특정 공간에서는 외부의 ‘게임 플레이어’에게 조종당하게 된다는 설정인데, 이 게임을 만든 천재 과학자는 작중에서 “1억 명이 내가 사라는 걸사고 내가 시키는 대로 투표하고 내가 시키는 일만 하는 거지”라는 발언을 한다.

 

자신이 개발한 나노머신을 유포시키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정도의 움직임을 강제할 수 있는 나노머신이 가까운 미래에 개발된다는 것은 그다지 현실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그런 나노머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더라도 대중의 움직임이 조종될 수 있다는 우려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파워블로거가 기업과 결합되어 지나친 광고를 했다는 것이 문제시된 적이 있었고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이런 문제는 광고라는 점을 감춘 채 광고를 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소위 ‘바이럴 마케팅’이나 일본에서 일컬어지는 ‘스텔스 마케팅’이라는 것들이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노머신처럼 완전히 조종할 수는 없다고 해도, 대중은 쉽게 세뇌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과거 냉전 시대나 그 이전 미국에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해 품었던 의심 이래 자주 볼 수 있던 일종의 ‘클리셰’라 할 수 있겠다.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좀비영화나 외계인이 인간의 신체를 강탈한다는 형태의 SF영화가 그런 ‘세뇌’에 대한 공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된 바 있었다.

 

『프랙탈』에서도 라이프로그를 제공하고 기본소득을 받는 프랙탈 시스템이 노후화되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자, 그런 시스템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이와 다시금 시스템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 3 레볼루션』에서 현실 세계의 노고에 지친 나머지 다시 가상세계인 ‘매트릭스’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물과도 같은 상황인 것이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알던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있겠지만 주변이 모두 세뇌되어 있는데 나만 혼자 세뇌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 자체도 이미 공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프랙탈』에서 그려지고 있는 내용이 그런 공포를 그리고 있진 않지만, 작중에서 보여지는 세계에서는 이와 같은 다양한 사유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일종의 ‘미래학’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분명한 SF라고 할 수 있을 텐데, SF 문화가 워낙 마니아의 전유물인 것처럼 되어 있는 국내에서도 보다 다양한 SF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길 바란다. 과거 케이블TV에서 방영된 국산 애니메이션 『레스톨 특수구조대』나 극장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에서 환경 관련으로는 미래 배경의 SF 작품을 선보였으나, 또 다른 방향의 SF도 보고 싶은 것이다.

 

 

- 왼쪽은 『레스톨 특수구조대』(1999년 방영/이동익 감독), 오른쪽이 『원더풀 데이즈』(2003년 개봉/김문생 감독)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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