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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KOCCA 행사

<문화원형을 찾아서>옛 백제를 추억하는 부여의 이야기를 듣다. 첫 번째 이야기

by KOCCA 2013. 12. 5.



12월이 왔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끝은 쓸쓸하기 마련입니다.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찬바람은 이런 감성을 더해줍니다. 쓸쓸한 12월이 왔지만 우리에겐 감사하게도 툴툴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1월이 있습니다. 이렇게 끝과 시작은 언제나 함께 입니다. 끝의 슬픔에 젖어 시작의 환희를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유유히 흐르는 천리 물길 구비에 고요히 안겨있는 부여는 차령산맥 남쪽 끝인 충청남도 남서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백제 성왕 16년(538년)부터 6대 123년간 백제의 찬란했던 영화가 고스란히 서려 우리 삶의 역사가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곳입니다. 백마강은 천년의 세월 동안 부여를 감싸 흐르며 비옥한 평야를 일궜습니다. 나는 백제의 마지막 고도 부여에서 찾은 탑에게서, 꽃에게서, 돌에게서, 강에게서 아련하게 찬란했던 옛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찬란한 백제문화의 정수 - 정림사지오층석탑


▶사진2 정림사지의 전경

 

부여읍 동남리에는 사방에서 볼 수 있을 만큼 높은 석탑 한 기가 서있습니다. 익산의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의 석탑양식을 대표하는 이 탑은 정림사지에 위치한 국보 제 9호 정림사지오층석탑입니다. 좁고 얕은 1층의 기단은 각 면의 중앙과 모서리에 배흘림기법의 기둥돌을 끼워 놓았습니다. 그 위로 올려진 5층의 탑신 또한 각 층의 몸돌 모서리마다 배흘림기법의 기둥돌이 세워져있습니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여인의 자태를 생각나게 합니다.


▶사진3 정림사지오층석탑 앞의 아이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1층의 얕은 기단으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고, 동시에 시원하게 뻗은 1층 탑신과 나머지 4층의 탑신의 비례로 상승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로써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구현하는 절대적인 미감(美感)을 보여줍니다.


시간은 흘러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평온을 가져왔지만 아직까지도 패망의 세월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1층 탑신의 4면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신라 연합군과 함께 백제를 점령한 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비명이 보입니다. 비명은 '大唐平濟國碑銘(대당평제국비명)'이라 적혀 있으며, 그 뜻은 "위대한 당나라(大唐)가 백제국을 평정(平百濟國)하고 기념으로 탑에 새긴 글(碑銘)"이라 해석됩니다.


▶사진4 정림사지오층석탑과 법당

 

과묵한 탑은 깊이 새겨진 슬픔을 안고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왔습니다. 비바람이 불어와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그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습니다. 경건히 찾아온 나에게 그는 낮은 목소리로 옛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러워했습니다. 나는 슬퍼하는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보는 것은 치욕의 역사가 아닙니다. 찬란한 백제문화의 정수입니다."

    

 

연꽃으로 환생한 백제의 옛 영화 - 궁남지


▶사진5 궁남지의 전경

  

부여읍내에서 남쪽으로 약 1km 정도 내려가면 형형색색의 연꽃들이 뜨거운 햇살 아래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끝없이 이어진 궁남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왕 35년(634년) “궁궐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 리에서 물을 끌어들여 사방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산을 모방하여 섬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무왕의 출생 설화와도 관련된 궁남지는 해마다 7~9월 사이 피어난 연꽃들로 장관을 이룹니다. 혹여나 놀라지는 않을까 살며시 다가간 나에게 연꽃들은 언제나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사진6 궁남지의 연꽃

 

백제시대 부여에는 홀로 사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그 여인은 달빛에 맞으며 연못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연못 속에서 용 한 마리가 솟구쳐 올라 여인의 몸을 휘감았고, 여인은 태기를 느꼈습니다. 열 달 뒤 아들을 낳아 이름을 서동이라 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서동은 성장을 했고 집이 궁핍하여 마를 캐며 살았습니다. 그 무렵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미모는 백제에까지 소문나 있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서동은 머리를 깎아 중 행색을 하고 경주로 갔습니다. 서동은 가져온 마를 경주 근방의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사진7 궁남지의 포룡정

 

'선화공주님은 서동이와 정이 통하여, 남몰래 밤에 안고 간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 나라로 퍼져 나갔고, 결국 진평왕의 귀에 까지 들어갔습니다. 화가 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귀양 보냈습니다. 공주가 귀양 가던 도중 길목에 기다리고 있던 서동은 절을 하고 정중히 모시니 공주는 흡족히 여기며 이름을 물었습니다. 서동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공주는 "동요가 맞았다" 하며 그를 따라 백제로 가서 살았다고 합니다. 서동은 뒷날 왕위에 올라 백제 30대 왕인 무왕이 됩니다. 무왕은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연못가에 궁남지를 만들어 선화공주와 뱃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사진8 궁남지의 연꽃

 

지금은 뱃놀이를 즐기던 서동과 선화공주는 없지만 사방팔방에 연꽃들이 있습니다. 또, 연꽃으로 환생한 백제의 옛 영화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궁남지에서 해마다 열리는 연꽃축제에 그윽한 연꽃 향을 따라 많이 이들이 찾아옵니다. 이렇게 궁남지는 도란도란 추억할 수 있는 옛 이야기와 잊지 않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사진 출처

-사진1-8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