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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KOCCA 행사

[문화원형] 문화원형을 찾아서, 두 번째 이야기 - 탐라답사기

by KOCCA 2013. 6. 26.

 

 

이 글은 <문화원형을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남쪽의 아름다운 섬, 제주도를 답사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모든 콘텐츠의 근간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숨겨져 있는 지역적 · 역사적 문화원형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럼 문화원형을 찾아서 제주도로 떠나봅시다.

 

◎ 세한도의 풍경이 남아있는 곳 - 추사유배지

 

현대에 와서는 제주도가 매력적인 여행기가 되었지만, 조선시대 까지만 해도 죄인들을 유배되는 유배지였습니다. 유배된 선비 중에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정희는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 때문에 무고를 당하게 됩니다. 6차례의 혹독한 고문 끝에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제주도로 위리안치 유배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위리안치 유배형이란 중죄인에게 적용되는 무거운 형벌로서 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거나, 가시덤불을 쌓고 그 안에서 유배인을 유배시키는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1840년 9월 4일에 한양을 출발해 9월 28일 저녁에서야 제주도 화북포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때 김정희의 나이 55세 때의 일입니다. 김정희는 그 날부터 제주도에서 8년 3개월 동안 유배를 살았습니다.


 

▲ 사진1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김정희는 유배생활 동안 2가지의 명작을 남깁니다. 하나는 추사체(秋史體)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세한도(歲寒圖)입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준 그림입니다. 통역관이던 이상적은 스승인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갔지만 제자의 도리를 다했습니다. 그는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최신의 서적들을 구해다 김정희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습니다. 유배되어 아무런 힘이 없는 자신을 이렇게 지극히 모시는 이상적의 모습에 감명하여, 김정희는 <논어>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입니다. 뜻을 풀어보자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김정희는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도 지극히 대해주는 이상적을 송백(松柏)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여 세한도를 그려 주었습니다.

 

 

▲ 사진2 김정희 유배지의 추사기념관

 

지금의 추사유배지에는 가시덤불로 둘러싸인 김정희의 유배지와 그 옆에 세워진 추사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추사기념관에는 김정희의 작품들이 경건하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어 떠나는 도중 노을이 지는 풍경 속에서 우연히 본 추사기념관의 외관에서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세한도의 풍경을 빼다 박은 추사기념관의 모습에서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억울하게 유배 온 김정희의 쓸쓸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 귤나무의 꽃향기는 지금도 황홀하네 - 관덕정, 제주목관아지

 

제주 시내 한가운데에 관덕정(觀德亭)과 탐라국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관아시설이 있었던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가 있습니다. 관덕정은 국가지정 보물 제322호이며, 제주도의 사람들에게는 만남의 장소가 되고, 길을 가르쳐 주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제주목관아지에는 조선시대의 제주목관아를 재현한 건축물들이 있습니다.

 

▲ 사진3 관덕정과 돌하르방

 

관덕정은 조선시대 세종 때인 1448년 제주 목사 신숙청(辛淑晴, ?~?)이 창건한 건물로서 당시 군사 훈련청의 역할을 했습니다.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용도이지만 ‘덕을 보는 정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건물로서 웅장한 규모에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건물 내부의 포벽에는 건립 당시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4폭의 벽화가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벽화는 상산사호(商山四皓),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십장생도(十長生圖)가 있습니다.


 

 

▲ 사진4 관덕정 벽화 대수렵도

 

 

관덕정의 4각에는 총 4기의 돌하르방이 굳건히 서있습니다. 현재 제주도에는 관덕정을 비롯하여 총 45기의 돌하르방이 남아있으며, 모양새로 본다면 관덕정의 돌하르방이 으뜸입니다. 석상의 형태로 벙거지 모자, 부리부리한 눈, 큼지막한 주먹코, 꾹 다문 입, 두 손을 배위에 위엄 있게 얹은 모습이 특징입니다.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왜 돌하르방이 제작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제주도의 특색 있는 돌문화의 상징입니다. 현재로서는 수호신적 기능, 주술종교적 기능, 금표적 기능을 했으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돌하르방의 코를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 다는 속설이 있어, 현재 남아있는 돌하르방 다수의 코가 갈려있는 상태입니다.

 

▲ 사진5 제주목관아의 전경

 

관덕정의 웅장한 모습과 그 앞에 굳건히 지키는 돌하르방의 위엄 있는 모습을 감상했다면 다음은 제주목관아지를 돌아볼 차례입니다. 이곳은 현대에 들어 새로 건축한 건물들이 대부분이지만 실제로 탐라국 시대와 조선시대까지의 중요 제주도 관아시설이 있던 곳입니다. 이는 제주대학 조사단이 1991년과 1992년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걸쳐 알아낸 결과이며, 세종 17(1435) 고득종(高得定, ?~?)이 쓴 <홍학각기>에 따르면 제주목의 관아 시설들은 총 58206칸 규모였다고 전해집니다.

 

▲ 사진6 제주목관아 정원의 귤나무 꽃

 

 

 현재의 제주목관아지의 오른편에는 다양한 종류의 귤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빈귤, 청귤, 홍귤 등 귤나무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수 십 그루의 귤나무에는 수줍게 고개 내민 꽃들이 피어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제주도에서만 자랄 수 있는 귤나무이기에 그 꽃향기는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은은한 내음에 취해 별 생각 없이 제주목관아의 정원을 걸으니 내가 마치 조선시대 제주목사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 시절 제주목사들도 6월이면 귤나무 꽃향기를 맡으며, 이 길을 걷지 않았겠습니까. 매년 6월이 되면 제주도에 맡은 이 향기가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제주도의 황홀한 귤나무 꽃향기는 예전에도 지금도 그곳에 있습니다.(3편에서 계속)

 

◎ 사진 출처

- 사진1 포털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 사진2-6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