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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KOCCA 행사

모던뽀이,조선의 마음을 훔치다 : 토월회(土月會) 창단 이야기

by KOCCA 2013. 1. 15.


 

연극을 본다는 것은 남의 집 한적한 앞마당에 자리를 깔고 누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한 공간 안에 있지만 서로 다른 세상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여 연기하고, 그들의 연기와 그들이 서 있는 공간을 관객의 공간과는 다른 공간으로 느껴지게 끔 하는 것이 연기의 힘입니다.



이처럼 연극은 어떤 인물이 개재하는 이야기를 무대에서 공연하는 예술입니다. 연극 자체는 그 기원을 알 수 없을만큼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시름을 잊기 위하여, 유흥을 위하여, 재미를 위하여 시작했던 연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전문화 되어갔고, 그 와중에 등장한 것이 바로 극단(劇團)입니다. 극단은 무대 연극 활동을 기본으로 하는 단체로현재도 국립극단을 필두로 수 많은 극단이 무대 위에 또다른 세계 - '연극' 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존하는 여러 개의 극단 중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름 중 하나 - 바로 토월회(土月會) 입니다.




 




토월회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시대적 상황과 연극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1900년 대 초는 일제강점기로 자유로운 사상의 표출이 불가능한 시기였습니다. 일제의 탄압정책과 회유정책으로 국내 연극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견을 표현하는 무대보다는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연극이 주를 이뤘습니다.



 



  1910년 대 신파극의 계보를 이어온 1940년 대 작품들

(좌) 영화_홍도야 우지마라

(우) 연극_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 류성의 삶과 예술
 

그러한 사조의 연극을 속칭 '신파극'으로 분류하였는데, 신파극에 대한 새로운 반기를 든 장르가 있었으니 바로 근대극을 수립하자며 등장한 '신극운동'입니다. 그 신극운동의 주축에 바로 토월회가 있었습니다.

 

 


극단 토월회의 창립동인들

왼쪽부터 박승희, 이서구, 박승목, 김복진, 김팔봉, 김을한, 송재삼.

ⓒ 동아일보 1978년 1월 1일

 


극단 토월회(土月會)

 

- 1923년 5월 설립~1946년 해체

- 1920년대 초 동경유학생들의 친목형식의 극단

- 신파극을 탈피하여 근대극 수립 목표

- 창단자 : 박승희  


  


1920년 대 초, 배움에 대한 각성으로 교육열이 상승했고 일본으로 향한 해외유학생이 급증했습니다. 그 중 동경에 모인 젊은 유학생들을 주축으로 친목 형식의 소모임이 생성되었고, 이가 바로 토월회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1922년 10월 동경 유학생 박승희, 김팔봉, 김복진, 이서구, 박승목, 김을한, 이제창 등 모여 의기를 투합했고, 1923년 5월 연학년, 이수창, 김명순, 임노월이 가담함에 따라 극단 명을 '토월회'라 제정하고 "현실에 발을 딛고 섰되, 이상은 명월 같이 높아야 한다"며 극단의 존재 이유를 밝혔습니다.

 

 

1919년 3.1 운동에 여파로 민중의 근대의식이 문화속에서도 팽배했고, 그 의지를 잇기 위해 토월회가 발족했지만 토월회의 활동은 생각처럼 녹록치 않았습니다. 

 


1923년 7월, 조선극장에서 박승희의 '길식', 버나드 쇼의 '그 남자가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 하나', 체홉 '곰' 등을 창립기념공연으로 올렸으나 배우 전원이 토월회 소속원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대사를 잊어버리고 애드리브가 난무한 무대에 박승희는 깊은 실망을 하여 퇴장하였고, 관객은 분노하였습니다.


 


1920년 대 근대 시민의식이 형성되며 그 의식을 담은 연극도 성장하였다

ⓒ 노작 홍사용

 

 

그 이후 연극에 뜻이 없던 주축원들의 탈퇴와 경제적 문제로 토월회는 잦은 휴식과 인원교체를 번번하다 해산을 선언합니다. 그들의 무대의 시작이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무대 자체는 완벽하지 않았으나 우리 연극사에서 토월회가 갖는 위치는 분명합니다.

 

 

당시 통속극으로 분류된 신파극에 자극을 주어 본격적으로 신극의 닻을 올렸습니다. 이는 1930년 대 예술로서의 연극을 잇는 기본이 되었기도 했으며, 한국 신극 사상 최대 공연 횟수 (87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1930년 대 등장할 소극장 운동의 필요성을 대두한 젊은 극단이었습니다. 재미로 뭉친 학생 집단이 아닌, 근대적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전문극단으로까지 발전하여 근대극을 정착시키는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학생연극은 열정과 수준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을지언정, 토월회(土月會)만큼은 사회에 의문을 제공하고, 관객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최초의 극단이라는 점을 기억할 때, 토월회의 무대정신은 현대의 연극 역시 본받아야 하고 잊어서는 안될 극단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기리며 예술의 전당에 '토월극장'이 신설되는 등 아직까지 우리 연극사에서 토월회의 의의는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토월회를 기리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구)토월극장

최근 투자받은 대기업의 이름을 딴 명칭 변경에 많은 비난과 우려가 있었다

ⓒ  예술의전당

 

 

 

지금은 다각도로 분화된 연극 장르는 관객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있습니다.

당연시 되는 연극 장르의 다양화.

그 다양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박승희와 그의 극단 토월회(土月會)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신극 운동의 선구자이자 연극계의 큰 별 춘강 박승희

(좌) 극작가 겸 연출가 

(우) 국립극장 내 위치한 박승희 기념비

ⓒ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