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상발전소/방송 영화

역사의 시간, ‘그 하루’에 관한 사람들의 흩어진 이야기 <역린>

by KOCCA 2014. 5. 14.

사진 1 역린 공식 포스터



‘역린’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입니다. 그 단어의 기원은 <한비자>라는 논저에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용을 잘 길들이면 올라탈 수도 있지만, 용의 목 아래 있는 역린을 건들이면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요. 이에 덧붙여서 임금도 역린이 있어 말하는 사람이 이 역린만 건드리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비유해서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영화 <역린> 역시 정조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 즉 아버지인 사도사제의 죽음과 엮어서 이야기의 포문을 열어갑니다. 



영상1 영화 역린 메인 예고편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오랜 기억에 남는 왕, 그리고 가장 많은 논란이 있는 왕을 고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 정조를 선택할 것입니다. 자신의 일기에 “두렵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다.” 고 남긴 불쌍한 왕이기도 하지요. 그의 모든 불행의 시작은 당파싸움에서 비롯됩니다. 노론파는 영조 38년(1762년) 기어코 정조의 아버지를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들지요. 이런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란 정조는 왕위에 앉아서도 늘 암살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서 살아야했습니다. 정조가 즉위하고 1년 만에 정유역변(1777년 정조의 침전까지 자객이 들어왔던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더 단단하고 훌륭한 군주로 성장합니다. 영화 역린의 ‘그 하루’는 정조를 조선 최고의 군주로 만들었던 정유역변의 그날에 대해서 심도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진2 영화 역린 스틸컷




사실 최근의 사극 캐릭터 경향에 비춰본다면 역린의 정조는 시대를 역행하는 캐릭터에 가깝습니다. 2010년 <추노>를 시작으로 <뿌리 깊은 나무>, <해를 품은 달> 등 브라운관에 몰아친 인간적인 혹은 조금 더 현시대와 가까운 사극 캐릭터의 인기몰이는 스크린으로도 이어졌습니다. <광해>와 <관상>으로 이어지는 충무로 사극 최고의 트렌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성’이었지요. 역사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역사를 다룬다고 말하는게 어울릴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흐름의 가장 위에는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의 욕망성을 극대화해서 보여준 영화였으니까요. 정리하자면 브라운관, 충무로를 통틀어서 인기를 끌었던 사극 캐릭터들은 입체적으로 욕망하고 갈등하며 시대를 관통하는 고민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인간상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3 영화 역린 스틸컷



하지만 <역린>의 정조는 조금 다릅니다. <역린>이 보여주는 정조는 인간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히어로 서사에 더 어울리는 캐릭터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왕족, 그중에서도 적통 후계자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지만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그의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세손 시절부터 그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노론파는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며 정조를 괴롭혔고 매일 같이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만 왕위에 오르고도 그렇게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제 역사의 기록에서도 찾아보면 정조는 대부분의 밤 누군가 자신을 죽이러올까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조선시대 500년의 통틀어서 가장 고된 왕위를 보냈던 그는 그야말로 ‘역사의 영웅’입니다. 이전에 극장가를 쓸고 다녔던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기억된 역사라면 ‘역린’의 정조는 역사가 기억하는 사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사진4 영화 역린 스틸컷




지속적으로 언급했던 것처럼 <역린>은 135분의 러닝타임동안 단 하루, ‘정유역변’의 그날을 집중 조명합니다. 그 하루를 위해 모든 걸 준비했던 많은 사람들,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갈등이 극에 다라는 날이지요. 역린의 공간적인 배경이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것도 바로 ‘그날’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서사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나 혹은 현실적으로 보나 권력을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건 단순히 사람을 하나를 죽인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처음부터 권력이라는 것은 상대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내 것이 빼앗긴다는 논리로 만들어지니까요.



사진5 영화 역린 스틸컷



그러다보니 <역린>에서는 정조의 24시간에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 동원해야 했습니다. 정조에 반대편에 서있는 권력의 중심에 대한 이야기, 중심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과 암살자, 그리고 정조를 지키려는 사람들까지. 그 짧은 암살의 준비 과정을 유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모두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모든 역경을 헤치고 영웅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가 겪는 상황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을 테니까요. 이런 복합적인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충무로 사극의 트렌드를 쫓아가게 됩니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 그리고 욕망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최근에 대두된 ‘인간적인 캐릭터’ 입니다.


그렇지만 관객들은 그런 영화 속 수많은 인간성에 피로함을 느끼곤 합니다. 물론 관객들도 저 이야기들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을 겁니다. 다양한 관계를 보여준다는 시도 자체는 좋았지만 나열식으로 이어진 인간적인 이야기들은 ‘정조의 영웅이야기’ 라는 한 가지 스토리에 집중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135분의 러닝타임 동안 너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니 관객들이 미처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고 할까요? 



사진6 영화 역린 스틸컷




이 영화는 브라운관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다모>의 연출자 이재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다모>외에도 <베토벤 바이러스>, <더 킹 투하츠> 등으로 이미 안방극장으로 사로잡은 그가 스크린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인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화면 구도는 물론 적당한 고증과 창의가 섞여서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요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정조의 암살을 코앞에 두고 벌어지는 액션씬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습니다. 적당한 긴장감을 구성하고, 관객과의 거리감을 좁히는 방식으로 사극 액션의 좋은 교과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인물 역시 꽤 공들인 티가 납니다. 버릴 인물은 하나도 없고 촘촘하게 개인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인물 하나만 다뤄도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매력 있는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사진7 영화 역린 스틸컷



이렇게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영화 <역린>은 꽤 밀도감 있는 영화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장면들이 스크린으로 집결하면서 조금은 작위적인 느낌이 납니다. 모든 인물들이 각각의 개성을 뽐내려고 뭉치다보니 영화가 내세운 ‘정조’라는 영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고나면 약간 허전한 느낌도 듭니다. 지나치게 완벽한 느낌이라 전반적인 서사의 몰입도가 조금 떨어지게 되는 거죠. 그 과정에서 캐릭터에 대한 회의감도 생기는데, 분명 ‘영웅 정조’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는 한데 과연 지금 내가 보고 나온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영상2 역린 OST 백지영의 불꽃 뮤직비디오



사실상 어떤 말을 붙여도 <역린>이 잘 만든 영화인 건 분명해보입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24시간이라는 틀 안에서 다루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고, 관객이 미처 인지하고 알아듣기도 전에 지나가버리고 만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이 영화는 잘 만들었지만 너무 많은 것을 다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 사진 및 동영상 출처

- 메인 이미지 및 사진 1,2,3,4,5,6,7, 영상1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상 2 WS Entertainment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