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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칼럼 인터뷰

시청자는 수목 밤10시에 벡터맨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by KOCCA 2013. 1. 14.

 

시청자는 수목 밤10시에 벡터맨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상민 (소설가, 칼럼리스트, 컨텐츠 기획자)

 

 

 

한동안 브라운관에 보이지 않던 차태현이 한복을 입고 돌아왔다. ‘줄리엣’의 남자였고, ‘엽기적인 그녀’의 순정파 남자 친구였으며, ‘과속스캔들’로 얻은 박보영을 보듬어준 멋진 아빠였던, 그가 이번에는 도술을 부리며 세상을 구하는 영웅 ‘전우치’란다.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지만 그래도 차태현이라는 배우가 주는 기대감 때문에 드라마를 시청했다.
그리고 5분이 흐르고 무의식중에 툭 튀어 나오는 말. 아, 이건 좀 아니다.

 

 


 

 

 


 

 

매주 수목 밤 10시, 프라임타임에 TV앞에 앉은 성인 시청자들은 결코 ‘벡터맨’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벡터맨’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눈높이를 말하는 것이다. 벡터맨은 어디까지나 저연령층 시청자를 타깃으로 삼은 특촬물이다. 그런데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전우치>는 훌륭한 연기자들이 대거 포진해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사극판 벡터맨’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이건 단지 어색하기 짝이 없는 CG효과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야기의 만듦새가 가지는 허술함, 더 구체적으로는 그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토양’과 ‘배경’이 너무 빈약하다.


이 드라마는 알려진 바와 같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몇 해 전에 이미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 최근에는 <도둑들>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최동훈 감독이 동명의 영화를 선보인 바가 있다. 그 영화는 몇 가지 다소 아쉬운 단점이 있었지만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원작을 재해석하고, 캐릭터를 배치하는 데 있어서 충분히 합격점을 받을 만했다.


하지만 드라마 <전우치>는 아직까지는 좋은 점수를 얻기 힘들어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앞서 말했듯 이야기의 만듦새가 너무 허술하다.
드라마의 배경 설명을 보면 주인공 전우치는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 출신이라고 나온다. 제작진이 과연 원작을 읽어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전우치는 홍길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어차피 드라마란 상상력을 발휘한 창작물이고, ‘도술’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어 재해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상력도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 드라마는 엄연히 ‘원작’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원형은 안고가야 했다.
 

 

 

 

 

 

 

원작에서 전우치는 전형적인 트릭스터다. 그는 타고난 도술 실력으로 개인의 영달이나 어떤 대의를 실현하기보다는 세속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희롱하는 악동 같은 인물이다. 어떤 면에선 천계를 농락했던 손오공과도 닮았다. 이러한 설정은 최동훈 감독의 <전우치>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를 보면 자신이 옥황상제의 아들이라며 임금을 속이고 농락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원작의 전우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장면으로 원작을 아는(읽건, 안 읽었건 간에) 관객들의 함의를 이끌어내고 전우치란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게끔 했다.
 

그러나 드라마의 전우치는 우리가 아는 전우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같다면 단지 도술을 쓴다는 정도. 보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드라마의 주인공이 굳이 ‘전우치’가 아니고 그냥 도술을 쓰는 ‘인물’이라고 해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제작진이 전우치전을 원작으로 삼았을 때는 분명히 그 원작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원작을 읽고 분석하고 공부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에선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원작에 대한 ‘몰이해’가 드라마를 망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눈을 돌려보자. 과거 전성기를 구가하던 홍콩영화들 가운데 <천녀유혼>이라는 작품이 있다. 서극이 제작한 이 영화는 포송령이 쓴 고대중국의 전기소설 <요재지이>에 수록된 <소천>편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천녀유혼>은 당시 관객의 입맛에 맞고 재해석하면서도 원작이 가지고 있는 큰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후에 <천녀유혼>은 3편까지 제작되었고, 극장용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로도 제작되었지만 <원작>을 해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원작>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다른 중국 문화의 콘텐츠들을 적절히 재배치해서 동일한 원작을 가지고 익숙하되 다양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냈다.


우리도 분명히 <요재지이>같은 훌륭한 문화적 토양과 콘텐츠들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원천 소스, 콘텐츠도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하고 활용할 줄 모르면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만큼 원작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조금만 부지런을 떨고, 세심했어도 지금보다 훨씬 나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이미 필요한 자원은 충분히 있다. 도서관에서 발품을 팔며 하루만 보내도 엄청난 보고를 찾을 수 있다. ‘어우야담’, ‘천예록’, ‘청합집’과 같은 사료들만 찾아봤어도 훨씬 더 풍부한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다. 


드라마 <전우치>는 그런 면에서 너무 아쉽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쓰지도 못하고 그저 이미지만 빌려온 이야기, 캐릭터의 생명력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매주 수요일 밤마다 한복 입은 ‘벡터맨’을 보는 것은 정말 곤혹스럽다. 그런 우려를 머릿속에서 떨쳐버릴 수 있는 이야기가 앞으로 남아있다면 또 모르겠다.
충분히, 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는데도 그 가능성을 살릴 수 없을 때만큼 아쉬운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