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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KOCCA 행사

서울 4대 문안길 여행 프로젝트, 3. 청계천 광통교 길

by KOCCA 2012. 12. 17.



3만여 개의 등불이 불을 밝히는, 서울 등 축제가 지난 11월 2일 있었습니다. 유모차에 탄 아기들부터 손 꼭 잡고 나오신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남녀노소 찾아가는 축제인 만큼,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리는 축제죠. 주말동안 수많은 민이 몰려 들었다고 합니다.
 
이번 등 축제는 '서울의 뿌리, 선조의 생활상'이란 주제로 ①한양도성, ②선조들의 이야기, ③백성들의 일상, ④열린 서울의 총 4개 테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양한 나라에서 출품된 등과, 우리나라 국내 지방들에서 출품된 작품들로 시민들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이 서울 등 축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청계천의 위에서 청계천의 양 옆을 이어주는 다리. 그 다리는 얼마나 신경을 쓰면서 걸어다니셨나요?
 
 
  
등 축체는 청계광장에서 시작하여 모전교, 광통교, 광교를 지나 세운교까지 이루어집니다. 색색의 등불들이 모여 수많은 인파가 걸어다니는 청계전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주요 코스의 다리 위의 이색적인 디자인도 늘 눈길을 끕니다.
 

△ 등 축제중인 광통교 : 국보 1호인 숭례문의 모형 등불
 
 
그 중에서도 오늘은 조선의 제일다리였던 광통교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광통교는 종로네거리에서 을지로 네거리 방향으로 나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의 청계천 위에 놓여있던 다리입니다. 광통교는 조선시대, 도성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돌다리’였고, 또한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였습니다. 다리의 길이는 물길의 넓이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길지 않았지만, 다리의 너비만큼은 가장 넓었던 거죠. 그 당시에는 다리의 너비가 곧, 가설자의 의지와 의욕을 보여주던 조선시대 때였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광통교의 위상이 높았음 알 수 있습니다.
 
문화 컨텐츠 닷컴에서 ‘광통교’를 검색해본다면, '조선의 제일다리 광통교'가 곧바로 검색되기도 합니다.
 
 

△ 출처: 문화콘텐츠닷컴http://www.culturecontent.com/
 
 
흙다리로 시작했지만 가장 먼저 돌다리가 되고, 도성의 중심지 운종가(현 종로)를 가까이 두고있어 가장 많은 사람이 통행하는 도성의 중심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낸 광통교의 역사를 살펴보러 가볼까요?
 
 

 

[ 청계천 광통교길 문화원형을 활용한 영상 콘텐츠 ⓒ문화콘텐츠닷컴 ]
 
광통교에는 참 사연이 많습니다. 먼저 이번에는 광통교의 초기부터 말하려고 합니다. 조선의 제일다리였던 광통교는 첫 설계부터 조선의 굴곡을 담고 있습니다.
 
 
처음, 광통교가 돌다리고 아니고 흙다리였을 때. 전체적 조선의 상황은 도성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온 어수선함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는 사람들의 운행을 ‘편하게’ 해줄 다리의 존재보다는 당장 궁을 지어야 했을 것이고, 임금이나 신하들이 지낼 공간이 더 먼저 필요했겠죠. 그렇게 조선 초, 조정의 관심의 범주에 들지 못했던 청계천의 ‘다리’는 장마철만 되면 사람들에게 골머리를 앓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홍수 시만 되면 많은 익사자가 발생했으니까요.
 
 
조선이 건국된 이후, 태종 10년. 또다시 흙다리였던 청계천이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때 드디어 왕은 광통교를 돌다리로 만들 것을 명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태종은 조선의 3대왕.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 태종은 하필, 주변의 다른 석재들이 아닌 조선의 건국 시조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소의 석물을 뜯어 다리 부재로 사용합니다. 생전에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를 총애하였던 것에 대한 원한으로 이루어진 일이겠지요.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의 묘를 애도의 깊은 뜻으로 특별히 일류석공에게 정릉의 석물을 마련하게 합니다. 이 정교한 석물이 오늘날 광통교에 사용된 신장석 등인데, 조선 당대 최고 수준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당대 최고의 걸작이 신덕왕후 강씨의 묘소에 있다가, 해체되어 태조의 아들인 태종의 명에 따라 광통교의 부재로 사용됩니다.
  
△ 광통교를 오가는 사람들
 
한 나라의 왕의 계비의 묘의 석물이, 도성의 모든 사람이 밟고 다니는 다리의 부재가 된 것입니다.
 
청계천의 광통교는 이렇게, 시작부터 왕실 권력 다툼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광통교의 유래를 알고 나서 광통교를 밟는다면, 광통교를 지나다닌다면 이제까지 평범하게 지나치던 돌다리로만 광통교를 바라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광통교를 이루고 있는 그 돌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 아름다운 문양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 광통교의 다리 부재가 되어버린 신덕왕후 묘의 석물
  


시작부터 조선의 역사를 담고 있는 광통교는 이후에도 조선의 역사와 숨을 같이합니다. 
 
한창 외세의 압력을 받을 무렵인 1899년에는 종로에서 남대문 구간의 전차가 가설되면서 광통교 동쪽에 전차선로가 놓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광통교는 일부 훼손됩니다.
 
게다가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일어나던 달에는 광통교 동쪽에 놓여있던 전차선로가 복선화되어 광통교 위로 전차가 다니게 됩니다. 따라서 광통교는 돌다리에서 철근콘크리트교로 확장되고, 다리의 본체는 도로 밑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1923년, 일제 치하에서는 청계천에 하수공사를 하게 되어 신덕왕후 계씨의 묘, 정릉의 신장석으로 이루어진 광통교 북측 교대 한가운데에 콘크리트 하수관을 박아 하수를 배출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1958년에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어 광통교의 난간은 이전되고 다리 본체는 묻히게 됩니다. 이후, 2003년에 시작된 청계천 복원공사에 따라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고, 광통교는 그제서야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됩니다.
 
출처 서울지명사전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culture.seoul.go.kr/sggDic/sggDic.do)
 
 

△ 광통교의 해치
 
 
그렇게 우리는 지금 광통교에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광통교. 그렇기에 더더욱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없이 지나다녔던 그곳에 대해 조금, 알아보았습니다. 
 
 
잠깐 팁을 알려드리자면, 광통교의 기둥에 붙어있는 QR 코드를 말씀드리고 싶네요.
 
 

[ 한국컨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 http://koreancontent.kr/544 ]

 
 
이곳에도 소개되었듯, 서울 사대문 안 길 이야기는 QR 코드를 통해 핸드폰에서도 간편하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광통교 QR 코드를 찍으면 만나볼 수 있는 4대문 안 길 이야기의 자세한 스토리! 지나치지 마시고 한 번쯤 찍어보세요~ :-)
 
 △ QR코드를 찍어봅니다:-)
 
 
 등 축제 중에 스쳐 지나가던 다리. 혹은 데이트 도중 청계천의 밤길을 걸으며 스쳐 지나갔던 돌다리. 
수많은 사람들이 밟으며 지나가지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던 다리였던 청계천의 광통교. 
이 길 위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지나치지 말아주세요. 
조선 600여 년의 역사,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의 역사.
 그리고 개발을 하던 때의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는 한 많은, 할 말 많은 다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