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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방송 영화

[뿌리 깊은 나무] 잘알려지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색다른 모습들

by KOCCA 2011. 12. 16.


요즘 뿌리깊은나무가 장안의 화제입니다.
콘텐츠 진흥원의 방송 영상콘텐츠지원 사업을 통해 제작된 드라마라는 건 다들 아시죠?
(http://koreancontent.kr/355)

 
한글창제 과정에 얽힌 다양한 인물들 간의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사실, 드라마에서의 파격적인 각색이 아니더라도 역사에 전해지는 등장인물들의 일화들은
상당히 재미난 부분이 많습니다. 실존했던 그들의 뒷 이야기 몇가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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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 절대음감의 소유자.


 <.... 다만 이칙(夷則) 1매(枚)가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입니다.> 


-세종실록 15년 1월 1일 악학별좌 박연이 제작한 편경을 세종 앞에서 시연하던 중

조선의 뛰어난 음악가인 '박연'이 악학별좌(樂學別坐)직에 있을 당시 음악의 조율의 기준이 되었던 '편경'을 새로 제작하도록 한 뒤, 그 결과물을 평가하는 자리의 기록입니다.

내용인 즉슨 편경의 음의 조율이 약간 잘못된거 같다고 세종대왕이 지적하자 살펴보니 '편경을 잘라낼때 가늠하기 위해 그어 놨던 먹이 제대로 갈지 않아 음이 어긋났습니다. 라고 박연이 보고 하는 장면입니다.

먹칠에 의한 음의 차이는 어느정도인가. 'KBS 한국사 전' 팀의 실험결과에 따르면 반음의 1/10 정도되는 음높이 였다고 하네요.  (...그야 말로 절대음감의 소유자라고 할만하죠?)

  


- 고기..고기...고기...

 
 





뿌리깊은 나무에서 은근히 자주 등장하는 '고기'. 다 이유가 있다...


<"주상이 젊었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였으니, 이제 초상을 당하여 소찬(素饌)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내가 어찌 어여삐 보지 않겠는가!"  >

- 세종실록 세종 2년 8월 29일. 세종의 큰아버지인 정종의 상중에 세종이 고기를 먹지않자 상왕 태종 이방원이 기뻐하며


<태종의 유교(遺敎)에도 또한 말씀하시기를, ‘주상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 ’고 하셨으니...>

-세종실록 4년 11월 1일, 고기를 끊어 '허손병'에 걸리자 대신들이 선왕의 유언을 언급하며 고기먹기를 간청함.

 

아버지인 태종의 유언이 .' 아들아 내 초상 치르는 동안 고기먹어도 괜찮다.' ... 이것만 보아도 세종의 유별난 고기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밥상에 고기 반찬이 없으면 한 숟갈 들고 갑자기 아픈척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하네요.

더욱 하이라이트는 고기 몇 달 안 먹었다고 진짜로 병이 나신 우리대왕님;;;;;;
(허손병 : 몸의 진기가 빠져 허약해 지는 병)


이후 국가의 대사로 인해 고기를 끊을 일이 생길 때마다 고관대작들이 한 두명도 아니라 6조의 모든 신하들이 달려들어서  '임금님 왜 이러세요!! 고기드세요! 고기!!! .'하고 상소를 올립니다.


더욱대 찬치상을 차리자 미리 찾아가서 고기반찬이 잘 차려졌나 살펴보다 왕족의 고기반찬이 신하들 것 보다 좀 작아 보이자 담당자를 불러서 문초하고... (세종실록 8년 1월 2일 )
(...고기 몇 점이 모자라다! 국법으로 다스리겠다!!! 크아아아!!)


국정에 근심걱정이 깊어보이니 주위에서 하는 말 - ' 그냥 고기드세요' '..그..그럴까?'
(세종실록 7년7월 28일)


게다가 어르신들이나 신하들에게 주는 상이 거의 '고기'... 심지어 황희 정승의 경우는 싫다고 하는데 억지로 먹이시죠...;;;(세종9년 11월 27일) (이렇게 맛있는걸 왜 마다할까...)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에서 '고기' 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세종실록에만 고기가 언급된 것이 무려 '504건' , 실록이 인증하는 역대 조선왕중 최고의 고기킬러입니다.


1940년 조선식찬연구소의 <조선요리학> 이라는 책에서는 설렁탕의 기원을 세종대왕이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임금이 직접 밭을 가는 친경행사를 하다 배가 고파서 그 자리에서 밭 갈던 소를 잡아 맹물에 끓여먹은게 기원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소는 농사용이 아니라 도시락....)


한편 독서나 악기연주가 주 취미였던 세종이 운동부족으로 질병에 시달릴까 태종은 억지로 사냥에 데려가서 운동을 시켰지만 태종이 승하한 이후에는 거의 운동을 하지 않아 각종 성인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사실 안했다기 보다는 역사,천문,건축,문화,학문,세법 등 각종 프로젝트를 전면적으로 나서서하느라 시간이 없었다라고 봐야...)

 

 


세종대왕의 비밀 조직 인물들


 


광평대군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한글 반포 2년전에 이미 사망....
 
 극에 충격을 불어넣었던 광평대군!

사실 광평대군은 죽음에 있어서 흥미로운 일화를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실록에는 창진,즉 천연두로 사망하였다고 전해지지만 야사의 이야기는 다릅니다.

세종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광평대군은 어릴적 점쟁이에게 '굶어죽을 관상' 이다 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에 세종은 왕의 아들이 굶어죽는다니 말이 되느냐라며 웃어넘기지만 , 실제로는 불안감이 있었는지 다른 대군들에 비해 훨씬 넓은 농토를 수여하는 등 굉장히 신경을 썼다고 하네요.

하지만 20세가 되는 해 준치의 가시가 목에 깊숙히 걸리며 빼지 못하여 염증이 도지고, 여기에 천연두가 겹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어죽게 됩니다.

이에 세종대왕은 놀라고 슬퍼서 3일동안 수라를 끊고(!?), 정무를 모두 중단하였다고 합니다.
(헌데 이날이 음력 1444년 12월 7일... 방송을 보신분들이라면 알겠지만 우연이라면 굉장히 놀랍죠?)

실제로도 지혜가 뛰어나고 효심이 극진하여 아버지에 의해 대가 끊어진 작은아버지인 이방번의 양자로 들어가서도 극진히 제사를 올리는 등 세종이 매우 아꼈던 아들이라 합니다. 

 

 


소이 - 혹시 정의공주가 모델?



똘망똘망.

 
사실 한글을 만드는데는 광평대군 보다는 첫째 문종, 둘째 수양대군, 셋째 안평대군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불어서 <죽산안씨대동보>에서는 세종대왕의 둘째 딸 '정의공주'가 큰 역할을 했다고 나옵니다.

한글창제에 있어 여러 대군들과 학자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척척 해결하여 한글 창제에 큰 공로를 세웠다고 합니다.

여성인데다가, 한글창제 있어 여타의 학자들보다 더 나은 업적을 거두었다. 마치 소이 같지 않나요?
(다만 <죽산안씨대동보>는 1976년도에 만들어진 책이니 야사정도로 생각해야겠죠..)

 

정인지



지금은 충신이지만 나중에는.......



작중에서는  세종의 짖궃은 농담에 곤혹스러워 하거나, 조선중신들의 반대에 끼어서 곤란해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을 쓴 사람입니다.

거기에 <고려사> 편찬, 달력인 <칠정산 내법><칠정산 외법>을 만드는데도 참여를 한, 이후 훈구파의 거두가 되는 당대의 대학자입니다.

세종도 정인지의 능력을 높이 사서 모친상을 이유로 3년간 낙향하겠다는 정인지를 붙들기 위해 법을 바꿔서 집현전에 묶어 놓습니다...(사원복지 그런 거 없는 대왕님..)

다만 학문이 아닌 행정쪽에서는 실수가 잦아 세종1년, 명나라로부터 즉위를 승인받는 자리에 명나라 국기를 빼먹는 실수를 하여 의금부에 하옥되는 등 태종이 직접 선정한 장원 급제출신이지만 굴곡이 많은 편이었다 합니다. 항상 라이벌인 김종서보다 승진이 뒤쳐졌고 그의 지휘를 받는 일이 많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합니다.

 



성삼문



사육신으로 유명한 집현전 학자입니다. 이름과 관련하여 일화가 전해지는데요. 태어날 시기가 불길하다하여 그 시간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출산을 막았다고 합니다. 이에 산모가 '아직 입니까?' 라고 세번 물었다는 설화. 혹은 태어날때 하늘에서 '태어났느냐?' 라고 세번 물었다하여 삼문(三問)이라 이름지었다 합니다.

극중에서는 까불대는 허당캐릭터로 나오는데 실제로도 장난끼가 넘쳤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과거의 장원을 정하는 자리에서 친한 친구인 이석형의 답안지를 보고 '그렇게 쓰면 떨어질 껄?'  이라고 고쳐쓰게 한 뒤 자신이 그 글귀를 훔쳐 써 장원급제 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답지를 고쳐 7등을 했던 이석형이 이에 대해 '내가 남에게 무릎 꿇어 본 적이 없거늘..'이라고 하니 '스스로 무릎을 안꿇으니 내가 굽혔지ㅋ' 라고 대답하며 한바탕 웃었다고 하네요.

또 성삼문은 대표적인 문관이지만 그 집안은 무관집안으로서 태종 때 부터 할아버지 성달생,아버지 성승 모두  이름 높은 무장알려져 있습니다.
(성달생은 조선시대 무과 최초의 장원급제자로 태종,세종 대대로 총애받았죠...혹시 조선 제일검 무휼의 모티브가...???)

 

  


박팽년


 

또 다른 사육신 중 하나죠. 성삼문, 신숙주와 더불어 절친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극중에서의 성격과 같이 성삼문과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굉장히 진중하고 고지식한 성격이었다고합니다.

이후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되자, 항상 전하가 아닌 '나으리' 라고 칭합니다. 세조가 격분하여 '장계에는 이미 신(臣)이라고 적어 올렸으며 ,나에게 녹봉을 받아 놓고 무슨 짓이냐'라고 다그치자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실제로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고 신자 대신에 거(巨)자로 썼으며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고 합니다.

3족이 멸해지는 벌을 받았지만, 당시 박팽년 집의 노비의 아이와 손자를 바꿔치기하여 화를 면해 현재까지 사육신중 유일하게 후손이 이어진 인물입니다.

 



 

이순지



 

작중에서는 등장이 미미하지만 이천, 장영실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입니다.

천문학자로서 조선시대에 이미 월식은 달에 비치는 지구의 그림자다라고 주장하여 여기서 나아가 월식의 그림자가 둥그므로 '지구가 둥글다' 라는 것과 '지동설'을 주장하였고 자신이 만든 <교식추보법>을 통해 월식과 일식의 날짜를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증명해 내기까지하지요. (갈릴레오보다 200년 앞서서!! 그것도 29세에!!!)

이후 중국의 역법은 조선에 맞지 않으니 새롭게 달력을 만들어 오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한반도를 중심으로 천체의 운행을 계산한 달력인 <칠정산 내법>< 칠정산 외법>을 만듭니다. 이 책에서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측해 놓았는데요 현대의 기술로 계산할때 365일 5시간 48분 46초. 즉 1초밖에 차이가 나지않습니다. 이정도의 기술을 가진 나라는 당시  아랍, 중국, 그리고 조선이 유일했습니다.

작중에서는 삼강행실도를 반포하는데 있어 의견을 제기했다가 욕을 얻어먹는 장면이 나오지만, 사실은 '이순지'가 아니라 최만리와 함께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정찬손'이 제기했던 문제입니다.

이순지와 세종과의 마찰은 이순지가 돌아가신 부모의 시묘살이를 하겠다고 3년간 휴직을 청하자 세종이 이를 거부합니다.(부모가 돌아가셔도 휴가는 없다...) 이에 이순지는 상소를 올린뒤 무단으로 귀향해 버리죠. 결국 세종이 항복하고 3년간 휴가를 줍니다. 공신 김종서, 정인지도 부모상을 제대로 못 치뤘다는걸 감안하면 굉장한 일인거죠. 아마 유일하게 장기휴가를 얻은 인물이 아닐지..

  

그 외 조정 대신들

 


최만리




작중에서는 노중년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정인지 보다 두살 연하.. 세종대왕보다도 한살 어립니다..

강직하고 임금에게도 직언을 마다않는 강직한 신하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당대 집현전 학자들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한글창제에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던 신하로 세종과의 엄청난양의 상소를 쏟아부었으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키배에서 완패하자) 사직서를 내고 낙향 후 얼마 안가 사망합니다.

한글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후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지만 사후 '청백리'로서 선정되었다는 점, 집현전의 실무책임자로 중용되었던 점, 게다가 서울 중구의 만리동이 바로 이분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는 점들을 비추어 볼 때 충직한 신하였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조말생



(훗날 독립군을 잡아들이는 악명높은 순사로 환생한다는 야사가...)

 
작중에서는 무인출신 관료(안기부장)로 나오지만 사실은 문과의 엘리트입니다. 
(세종시절에는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맡으니 그리 틀린해석은 아닐지도요.)

태종때부터 고속승진에 고속승진을 거듭한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으며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세종대왕도 조말생을 중용합니다. 기개있고 도량이 큰 대신이었다고 하네요. 또한 노비출신 장영실의 승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깨어 있는 인물입니다.

다만 평생의 오점이 되는 뇌물사건에 연류되어 파직당하게 됩니다. 이 당시 관리가 과도한 뇌물을 먹으면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였는데 조말생은 이 기준의 10배가 되는 수준의 뇌물을 수수하였음이 밝혀지죠...

하지만 세종은 선왕이 아끼던 신하였던데다, 그 능력을 높이사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세종대왕도 완전히 용서하였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후 조말생은 복직하여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지만
계속 묵살 당하였고, 오랜기간 조정에 있었음에도 끝내 정승에 자리에 오르지 못합니다.

이러한 오점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만큼은 매우 높이 평가되어 75세가 넘어가자 나이를 이유로 사직할 것을 청하지만 세종은 들어주지 않고 계속 일할 것을 종용하죠 (승진은 없지만 퇴직도 없다...본격 노예지옥...;;)

 

 

황희


자타공인 세종 노예. 노인을 위한 사직서는 없다...


'네 말도 옳다!'의 일화 때문인지 이래도 허허, 저래도 허허 라는 도량넓은 대인배의 모습도 있는 반면 일처리에 있어서는  매우 강경한 원칙주이자인데다가 급진주의적인 모습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도량이 크지만 추진력과 결단력이 매우 강하여 쟁쟁한 대신들의 논쟁도 결국 황희 정승의 의견으로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눈빛이 굉장히 날카롭고 기가세서 심약한 사람은 물론 동물들까지 째려보기만해도 맥을 못추었다고 합니다. 북방의 호랑이라는 김종서도'황희 정승만 보면 오금이 저린다.' 라고 무서워 했다고 하죠.
(말년에는 삽살개랑 눈싸움을 해도 삽살개가 도망가지 않으니 '내가 죽을때가 다 되었나보다.'라고 한탄하기도...)
 
 

그분의 눈빛을 초상화로라도 감상해보자.



고려말부터 벼슬길에 올라 조선 건국시 두문동에 은거했다가 태조의 권유로 다시 복직, 태조,문종,태종,세종 4대에 걸쳐 벼슬을 하는데 강직한 성격 때문에 좌천도 많이 당하지만 이,호,예,형,병,공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쳐 69세에 영의정에 올라 18년간(!?) 세종치세에 큰 축으로서 활약합니다.

...활약이 지나쳐서 말년에는 사직서를 올리고 또 올려 11번에 걸치는 사직신청에도 불구하고 '거동이 불편하면 가마를 타고 오시오' 라며 가마와 지팡이를 하사하는 등 87세(!)가 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을 이어갑니다. 
(검은소가 일을 잘하오 누런소가 일을 잘하오? 황희정승이 제일 잘하오)

다만 사위와 아들들이 굉장히 못나서 그들의 사건들을 덮어주느라 파직도 당하고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사실 황희정승은 의외로 뇌물 수수 사건에 많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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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물들의 설정 외에도 성균관의 유생들을 위해 지어진 반촌에선 사법활동이 제한 되었다는 점.
(그래서 극중에서 반촌으로 도망가면 함부로 쫒지를 못하죠?)


한글창제에 찬성한 인물들 중에는 '중국 문자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어 대국을 섬기는 일이 쉬워진다.'라고 했던 인물도 있다는 점.


사실 정도전 일가는 몰살 당하지 않고 그의 동생이나 사촌들의 일가는 계속 관직생활을 했으며 살아 남은 아들인 정진은 세종때 형조판서직에 오르기까지 했다는 점 등등.


역사적 사실들과 비교하여 본다면 그 차이가 재밌기도 하지만 각색을 한 작가들의 연출의 디테일과, 연출 의도들이 보다 뚜렷하고 풍부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최종화를 향해 숨막히게 달려가고 있는 뿌리깊은 나무! 앞으로도 지켜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