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품은 작가가 그 모든 것을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제목에 이미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된 다중 의미와 관점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지훈의 시 <승무> 속 첫 번째 연과 마지막 연을 맺는 구절을 제목으로 빌려온 웹툰 <나빌레라>가 그렇습니다. 승무를 추는 승려의 모습을 묘사한 ‘나비로다’라는 뜻의 우리말이 우아하게 담긴 이 시구 ‘나빌레라’에는, 그것이 ‘나비일까?’ 의심하는 조심스러운 추측과 ‘나비로구나!’ 깨닫는 확신이 공존합니다. 동시에 익숙지 않은 이 표현 속 정적인 명사 ‘나비’가 마치 형용사와 동사처럼 이어지면서 나비가 춤을 추는 모습을 생생하게 연상시키기도 하는데요. 실제로 주인공 ‘삼덕출’이 현실의 제약과 사람들의 의심을 뿌리치고 꿈을 실현하는 작품 속 비상의 과정은 제목이 함의한 위 세 가지 관점을 순차적으로 거치며 그려집니다.
어른의 의심하는 눈, 그건 나비일까?
<나빌레라>의 줄거리는 70세 노인 ‘심덕출’이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동안 하고 싶었던 발레에의 도전을 별안간 선언하며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덕출의 흔치 않은 결정의 진정성을, 그것의 성공적인 실현 가능성을 의심합니다. ‘노인의 몸으로 왜 하필 발레일까?’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심지어 본작 관련하여 독자가 처음 갖는 관심도 ‘노인의 발레 이야기’라는 핵심 설정에 관한 호기심에 가깝습니다. 덕출의 장남 ‘심성산’은 그러한 작품 안팎의 극대화된 의심을 대표해 아버지의 결정에 대한 반대 의사를 구체적 행동으로까지 표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덕출이 당장 원하지 않는 합가까지 속히 실행하려고 합니다. 성산은 겉으로 보기에는 소위 말하는 효자의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에 들어갔으며, 일찌감치 가정을 이뤘습니다.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고, 두 분이 편안한 노후를 맞이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으로 아버지를 자기 삶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은 채 제 생각 안에 가두고 있으며,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는 발레에 관한 이해마저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의견만이 정답인 양 정해진 선택을 강요하는 어른처럼 말입니다.
덕출의 결정을 의심하고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산의 생각은 ‘남성 노인은 발레를 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라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실 성산만의 것이 아닙니다. 작품 밖에도 분명 존재하는 ‘무용은 여성적’이라는 편견은 지난 전통에 근거합니다. 오랜 역사 동안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무용’은 19세기 근대에 들어선 후 반대로 남성적인 신체 활동이 ‘체육’으로 한정됨으로써 오롯이 여성의 것으로 배분되었습니다. 여성 혹은 여성성을 타자화, 객체화된 존재로 ‘구별’하는 구시대의 폭력은 자연스럽게 여성적 활동으로 간주된 발레마저 구별했습니다. 성산은 스스로 고백했듯이 발레에 관해 잘 모릅니다. 자식 세대인 그는 아버지보다 나이만 어릴 뿐 주체가 보고, 객체가 보이는 식의 종속 관계로 굳어진 지난 세기의 편견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구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는 성산이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현 아버지 세대가 발레를 실제 공연보다는 미디어 보도를 통한 이미지로만 수용한 까닭도 큽니다. 이로 인해 예술이 현대사에 들어선 지 100년이 지나 동시대 예술로 소비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무용이 여전히 철저히 ‘보이는’ 객체에 머물러 있는 작품 내 편견은 그럴듯한 안티 테제가 됩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발레 행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발레를 객체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사고로는 발레를 하는 이의 신체 역시 객체입니다. 객체는 절대 스스로 기능하거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다른 무언가로 교환된 후에야 비로소 의미를 지닙니다. 다른 자녀들과 함께 발레 단장 ‘문경군’마저 최초에 심덕출에게 대신 권했던 등산과 에어로빅 등은 ‘건강’으로의 교환 가능성이 큰 건전한 취미생활이지만, 발레는 그마저 결과를 확신할 수 없기에 그저 다른 이에게 부끄럽게 보이는 ‘짓’이나 ‘꼴’(3화)에 불과하게 됩니다.
성산과 비슷한 수준은 아니지만 덕출을 걱정하는 여타 인물들의 소극적 의심은 발레나 성 역할에 대한 차별보다 노인 신체에 대한 구별 및 억압과 관련 있습니다.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덕출의 신체는 웬만한 젊은 사람 못지않은 체력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대개 노인의 몸이 젊은 사람보다 훨씬 연약하고 쉽게 망가진다는 통계적 의심은 반드시 그러하다는 기정사실이 되어 사람들의 의심을 더욱더 자라게 합니다. 이는 비단 실질적인 신체 능력이나 그것과의 관련성과 무관하게 노약자의 생산성을 무조건 무시하는 가속화된 현대 산업화 세계의 속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기도 합니다. 신체의 물리적 능력이 생존에 직결되었던 고대와 다를 바 없이, 현대에서도 활력과 변화를 구현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추앙받는 이, 높은 가능성과 성장 동력을 가진 이는 주로 젊은 사람들로 평가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N포세대’, ‘소확행’와 같은 용어의 무게를 젊은 세대에게만 한정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오히려 앞선 생애를 통해 이미 많은 것을 누렸고 지니고 있다는 인식으로 인해, 노인 세대는 자기 지향성에 대해 더욱 가혹한 무시를 당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덕출은 비단 자연적인 노쇠만이 아니라 알츠하이머병(이하 치매)까지 안고 있었고, 이는 사람들의 눈에서 점차 가셨던 의심을 더욱 증폭하는 결정적인 장치가 되었습니다. 그의 바른 생활 습관이나 운동으로도 늦출 수 없는 불가항적 질병으로서의 치매는 단지 성산만이 아니라, 작중 모든 인물과 독자의 눈에마저 의심을 드리우게 했습니다. 어쩌면 덕출은 ‘무대에 서지 못할지도 모른다’라고. ‘날아오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늙음’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모든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 같다”(1화)는 작품 속 덕출의 첫 내레이션은 도전을 앞둔 그가 익숙함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다지는 말이었지만, 거꾸로 반복되는 좌절에 익숙해져 발레에 대한 단념을 재촉하는 말로도 언제든 뒤바뀔 수 있습니다. 실제로 덕출은 무대를 코앞에 두고 공연을 포기하게 됩니다(55화). 여러 차례 부침을 거쳐 쌓아올려진 의심이 최고조에 달해 덕출의 도전이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아이의 확신하는 마음,
‘그건 나비로구나!’
덕출의 도전에 대한 보편적인 편견으로부터 제반 의심을 거두고 성공을 확신하는 일은 개별 인물 간 상호 믿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자식들의 반대에 부딪힌 덕출과 가장 가깝게 지내며 그에게 결정적 도움을 주는 인물은, 현실에서는 뜻밖이라 할 수 있는 손자뻘의 ‘이채록’ 입니다. 경국의 지시로 파트너를 이루게 된 덕출과 채록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위기 상황에서 연대하며 서사를 이끌어갑니다. 생판 남이었던 청년과 노인 두 사람이 점차 마음을 열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긴밀한 관계 설정은 작위적이지만 설득력이 높기도 한데, 이는 두 캐릭터가 여러모로 상호 거울상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일흔을 며칠 앞둔 덕출은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느라 막상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만 했던 인물입니다.
반대로 스물셋의 채록은 비록 가난하지만 하고 싶은 축구와 발레에 도전할 수 있는 재능과 기회가 일찌감치 주어졌던 인물입니다. 덕출에게는 가족이 있었지만 발레가 부재했고, 의지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멀어진 채록에게는 발레가 있었지만, 가족이 부재했습니다. 한편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시점에 덕출은 막상 하고 싶었던 발레에 도전하는 그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가족이 없었고, 채록은 하고 있던 발레에 대한 의지와 희망이 조금씩 희미해지던 터였습니다. 그런 덕출이 채록의 매니저이자 제자가 됨으로써 발레를 할 수 있게 되고, 채록은 할아버지에게 발레를 가르치고 그를 보살피는 살뜰히 보살핌으로써 다시금 가족애를 느끼고 목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두 사람은 서로의 빈자리를 꼭 들어맞는 천생연분인 셈입니다.
덕출의 가족 및 그와 채록이 함께 하는 대안 가족 이야기가 사건과 관계의 중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나빌레라>의 장르는 분명 휴먼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서로 대칭의 속성을 지닌 두 인물이 반강제로 관계를 맺고 비슷한 꿈과 열정을 공유하며 함께 성장한다는 스토리 구조나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공유하며 서로 다른 인물들이 절대적인 믿음을 나눈다는 비현실적 설정은 소년만화나 성장물에서 자주 반복된 요소이기도 합니다. 덕출이 성인이지만 그의 일상이 직장이나 생산 활동에서 벗어난 노인이라는 점에서, 또한 그가 미성년처럼 어른들의 편견이나 신체의 불가항력에 대항해 새로운 꿈에 도전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소년만화 속 주인공과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초반에 덕출을 반신반의하다가도, 누구보다 그를 신뢰하고 절대적인 지지와 도움을 주게 되는 채록의 존재 역시 소년만화 속 주인공의 조력자 역할과 판박입니다. 이들은 절대 논리적 판단이나 현실적인 가능성을 잣대로 꿈과 우정 같은 순수한 가치를 재단하지도, 그것의 배신을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듯 절대적인 믿음을 보입니다. 작품 말미, 덕출이 목표로 삼았던 무대에 오르지 못할 것이 확실시되어가는 위기의 순간에 서로를 향한 믿음은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급격히 악화한 치매 증상으로 인해 스스로 공연 당일 무대에 오르길 단념한 덕출을 채록은 재차 설득합니다. 덕출이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해낼 수 있으리라는 강한 믿음으로. 이 같은 신뢰는 연쇄적으로 작용해 다른 캐릭터에게도 전염됩니다. 경국에게 소리치는 채록의 모습, ‘하고 싶다잖아! 할 수 있어요! 허락해 주세요!(55화)’은 어린아이가 쓰는 생떼에 가깝지만, ‘우리만 하는 소극장 공연 아니(55화)’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이던 경국도 결국 채록을 해낼 것을, 채록과 함께 덕출이 해낼 것을 믿어 보입니다. “사람이 언제 초라해지는 걸까?”라는 질문에 ‘스스로 초라하다고 생각하고 믿는 순간(13화)’이라고 자답했던 덕출이, 스스로 포기했고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무대를 채록의 반복된 설득에 다시 용기를 얻고 도전하는 순간 ‘나는... 정말... 발레가... 발레가 하고 싶어(55화)’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소년만화에서 익히 보아온 수미상관적 연출입니다.
<나빌레라>는 종종 대사 하나 없이 작품 속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공들인 연출로 작품 밖 독자들의 신뢰를 얻어내기도 합니다. 발레단을 방문해 무용수의 연습을 구경하며 발을 꼼지락거리는 덕출의 뒷모습(5화)을 통해 발레에 대한 진지한 그의 열정과 의지를 독자에게 재차 확인하게 하고, 하고 싶었던 말을 아버지에게 전하려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머뭇거리는 채록의 모습(16화)을 통해서는 할아버지와의 관계 이외의 면에서도 조금씩 성장하는 그의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줍니다.
다리를 다친 이후 잠시 좌절했지만 경국의 배려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덕출이 ‘지금까지보다 더 잘 해내고 싶’(30화)다는 말에 가만히 그의 어깨에 손부터 올리는 채록의 행동에서는 이제 덕출을 보듬고 북돋는 보호자 같은 관계로 역전된 그의 믿음직한 면모를 읽을 수 있고, 길을 잃었던 덕출을 데리러 간 채록이 그에게 다짜고짜 발레 동작을 시키는 장면(33화)은 막판 치매 증상에도 덕출이 발레 동작을 쉽게 잊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의 복선이 됩니다. 결국 치매가 중증으로 진행되어 가족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덕출이 차가운 바벨 봉을 잡고 몸이 기억하는 발레 동작을 해 보이는 장면(에필로그, 후기)은 어떤 대사 없이도 독자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합니다. 이처럼 여러 차례 반복되는 섬세한 장면 연출을 통해 독자는 의심을 버리고 작품과 작가를 순진하게 믿게 됩니다. 그리고 <나빌레라>의 끝에 비참하고 현실적인 비극이 아닌, 아름다운 결말이 있음을 기대하게 됩니다.
춤추는 낭만,
나빌레라
작중에도 언급되듯이 ‘발레는 스포츠가 아닌 예술’(5화)입니다. 예술의 세계는 현실로 쉬이 실현될 수 없는 낭만을 품고 있습니다. 발레는 발끝을 세운 채 수도 없이 튀어 오르고 점프를 하는 등 물 흐르듯 중력에 저항함으로써 비정상적인 동작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일깨웁니다. <나빌레라>가 ‘의심’으로부터 ‘확신’으로 착실하게 나아가는 서사는 궁극적으로, 극 중 인물과 독자들에게 마치 발레 동작처럼 비현실적이지만 아름다운 춤을 선사합니다. 현실의 드라마, 드라마적 현실에는 별수 없이 ‘악당’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악인’은 아닐지언정 어느 누군가에게만큼은 분명한 ‘악역’이 되어 주인공 혹은 자신에게 고통과 좌절을 안깁니다.
하지만 <나빌레라>는 그 어떤 인물도 그저 악역에 머무르게 하지 않습니다. 채록을 괴롭히는 동창 ‘성철’에게는 길 잃은 덕출을 챙겨줄 기회를 주고(33화), 덕출의 도전을 촬영하고 이를 자극적으로 편집해 그의 꿈을 웃음거리로 만든 PD 박정서(22화)는 바로 다음 화에 성관에게 사과를 건네게 합니다. 덕출의 도전을 의심하고, 사사건건 심한 말을 쏟아내는 성산마저 그의 뒷모습과 눈물을 조명함으로써 독자에게 그를 이해하게 합니다.
이들의 반대편에서는 작품 곳곳에 있는 조력자들과 선한 역할을 대변하는 캐릭터들이 작가의 교훈을 대신 전하기도 합니다. ‘자식 번듯하게 잘 사는 거로 부모가 자식 앞에 약자가 돼야(15화)’ 할 이유는 없다고 일갈하는 엄마, ‘어쩌면….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이 원하고 계신 걸지도 모르잖아? 그런 거면 우리가 도움은 못 되더라도 방해는 하지 말자(31화)’고 형제들을 설득하는 막내 ‘성관’. 심지어 가족도 아닌 성산의 친구 민구는 친구 아버지인 덕출에게 ‘부족한 저희 식구들을 대신해서 아버지 친구로 계셔주셔서 정말 감사(19화)’하다 하고, 스승인 경국은 제자 채록에 ‘난 한 번도 널 의심한 적 없어. (중략) 네가 해내 줄 거라고 늘 믿고 있었다(55화)’라며 군말 없이 그의 무모함을 덮어줍니다. 독자의 마음을 대변하고, 나아가 덕출과 채록 등 주요 인물을 향한 애틋한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인물들에게 깊은 갈등이나 감정의 골은 절대 생길 수 없습니다. 이 덕분에 할아버지 덕출과 손자뻘 채록은 자연스레 친구처럼 지내게 되고, 스승 경국과 제자 채록 사이 불편한 권위주의는 스며들 틈이 없습니다.
<나빌레라>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사건 흐름은 신선하고 창의적인 ‘예술’보다는 멋지고 아름다운 ‘이상(理想)’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흔히 벌어지는 소통의 부재나 오해를 쉽게 발생시키지도 않고, 설사 그것이 생겨나더라도 오래 끌고 가지 않습니다. 실제 가족이든 덕출과 채록 사이 형성된 대안 가족이든 세대 간 갈등이 먼 나라 얘기가 된 작품 속 세계는 인물들의 휴머니즘적 면모가 그 어디에서보다도 두드러집니다. 이는 모든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 덕출이 물리적으로 칠순 노인의 몸으로 유연한 몸과 체력을 자랑하고, 스스로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걸 찾아보고(3화)’ 발레단에 들어가며, 스마트폰으로 쉽게 셀카를 찍을 정도로 젊게 사는 인물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칠십 평생을 허물없이 건실하고 세심하며, 심지어 크게 몸 불편한 곳 없이 시대에 뒤처짐도 없이 영민하게 살아온 노인에게 자식과 주변 인물들은 저마다 그 표현 방식이 다를지언정 같은 애정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웹툰’으로서의 장르성은 훈훈한 서사와 설정 위에 미려한 심상을 덧댈 수 있게 합니다. 시종일관 균질한 색온도로 섬세하게 조율한 화풍 위에 세월의 흔적이 드리운 노인의 깊은 주름은 얇고 짧은 선 몇 개로, 생의 최종 장을 보내고 있는 어두운 낯빛은 남들과 다르지 않은 밝고 화사한 톤으로 표현됩니다. 젊은 사람들과 비교해 어딘지 다르고 느릴 수밖에 없는 노인의 동작과 행동은 컷을 읽는 독자 저마다의 상상에 따라 남들과 엇비슷한 양태와 템포에 수렴합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은 절대 어색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다른 작품 속 아이와 같은 낭만은 팍팍한 일상을 대하는 우리의 사고를 나풀대는 춤으로 뒤바꿉니다.
나비의 꿈:
‘그건 꿈이었을까?’
작품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주인공의 주체성과 도전 의식, 이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성장 및 관계성 회복 등의 주제 의식을 ‘발레’라는 예술 형식에 투영함으로써 무척 온건하게 담아냈습니다. 만약 여기서 발레가 없었다면 이는 현실에서 생존권을 포함한 ‘사람답게 사는 삶’에 관한 담론 자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여러 사회문제나 이를 위시한 각종 변혁의 의지를 외면하고 그에 볼멘소리를 내는 보수적 논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의 삶이면 충분하지 않으냐’는 것. 이는 아버지 덕출에게 ‘지금까지 점잖게 잘 살아(2화)’왔는데 이제 와서 왜 그렇냐는 듯 반대하는 성산의 ‘의심’과 닮았습니다.
한 개인이든 개인을 아우르는 세대든 사람됨을 지향하는 주체의 치열한 투쟁은 시대와 집단을 아울러 함께 응원하고 힘을 보태야 할 공공의 혁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나빌레라>는 예술을 빌려 투쟁의 가장 우아한 면만을 남깁니다. 덕출의 꿈을 채록보다 먼저 돕고 응원한 경국의 말마따나 비상의 꿈은 ‘추하지 않습니다(30화)’. 안타깝게도 마지막 순간에 덕출은 모든 것을 망각합니다. 발레에 매진했던 마지막 생애는 물론, 지난 70년 세월이 마치 스쳐 지나간 백일몽이 된 마냥 그의 기억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장자의 ‘나비의 꿈(胡蝶之夢)’ 설화가 주는 교훈처럼 작품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현실이든 꿈이든 상관없다는 사실입니다.
덕출의 도전이 헛되지 않은 것은 그의 꿈과 도전에 함께 했던 채록과 주변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 이야기가 추하지 않은 것은 그 의지가 주변 인물에게 남아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시 <승무>에는 춤을 추는 승려에 관한 사연이 일절 생략돼 있습니다. 오히려 그의 춤사위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만이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의 시절은 너를 만나 다행이고 우리를 만나 꿈만 같구나(56화)’ 덕출 한 사람의 소망에서 출발한 <나빌레라>의 이야기는 ‘우리’의 것으로 남았습니다.
누군가는 B급 발레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각자의 실패와 상처를 안은 아이들을 ‘아직 목표를 가진’ ‘엘리트’로 믿고 그 꿈을 돕는 경국, 채록에 평생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형으로 남겠다(35화)’고 고백하는 성관, ‘해보고 싶은 거 해보고, 가보고 싶은 곳’에 가보며 ‘행복하게 살(7화)’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이어받을 혜진, 게다가 가벼운 농담조나 작품에 대한 불만 하나 없이 댓글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독자들까지. 덕출의 춤을 지켜본 이들에 의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저마다의 날갯짓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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