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커플의 나라로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한국인이 연애를 하고 있는데요. 삼포세대, N포세대라는 별칭을 가진 2030 세대라 해도 예외는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포기해도 연애는 포기하지 못하는 게 한국의 청년층입니다. 이만큼 한국 사회에는 현재, 연애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한국의 연애를 그려낸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유미의 세포들>입니다. <유미의 세포들>은 평범한 30대 직장인 ‘유미’ 가 소개팅을 계기로 남자친구 ‘구웅’을 만나 사랑하고 이후 이별을 거쳐, 새로운 인연인 ‘유바비’를 만나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자칫 단순할 수 있는 스토리에서 중요한 차별점이 되는 것은 바로 세포들의 존재입니다. 세포들은 ‘유미’의 머릿속에서 ‘유미’의 감정과 행동을 결정하는 존재로서, 그들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따라 줄거리가 좌지우지됩니다. 여기서는 유미와 연애상대라는 외적 부분과, 유미와 유미의 세포들이라는 내부적 관계를 나누어서 논하기로 합니다.
<유미의 세포들>의 작가 이동건은 작품의 줄거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인공 ‘유미’가 사랑을 하고 권태기를 맞고 헤어져 또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집중해야 할 지점은 주제 선정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입니다. 왜 주제를 권태와 새로운 만남으로 정하였는가? ‘유미’는 왜 권태를 겪고 왜 권태로 인해 헤어지며, 왜 이별 후에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유미’의 전 남자친구 ‘구웅’과의 연애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유미’ 와 ‘구웅’은 소개팅으로 만나 교제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웅’의 이성 친구인 ‘서새이’가 ‘구웅’ 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유미’와의 관계에 훼방을 놓게 되면서 ‘유미’의 연애는 난항을 겪습니다. 이에 대한 ‘구웅’의 미숙한 대처로 인해 ‘유미’는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고, 그에 이어 ‘구웅’의 계속되는 우유부단하고 미적지근한 태도로 인해 이별을 결심합니다.
영화 <HER>에서 주인공 ‘사만다’는 그의 연인 ‘테오도어’에게 이별을 고하며 ‘테오도어’를 책에 비유합니다. 인공지능인 ‘사만다’에게 그는 책과 같습니다. 학습능력이 뛰어난 ‘사만다’는 ‘테오도어’를 독파해버렸고 이제는 그와 사귀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상대에 대해 잘 아는 것, 이에 수반되는 익숙함, 그것이 권태의 핵심입니다. ‘구웅’은 이러한 이유로 ‘유미’에게서 권태를 느꼈습니다. 헌데 연애에 있어 권태라는 것은 매너리즘의 의미 그 이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익숙함에 더해 그에 수반되는 불성실한 태도가 연애에 ‘권태기’가 찾아오는 주된 이유입니다. 상대에 대한 익숙함으로 인해 그의 소중함을 망각하는 셈입니다.
권태를 겪고 새로운 사랑을 찾는 이유는 앞서 말한 책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책을 다 읽었다고 독서를 그만두어 버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책에 대한 궁금증이나 갈망이 생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연애 초반에 느낄 수 있는 설렘은 생소함에 기인합니다. 갓 자신의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에 대한 생소함과 거리감이 역설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생소함의 전략을 통해 ‘유미’의 마음을 연 것이 바로 ‘유바비’입니다. 그는 ‘구웅’과의 교제 시절부터 ‘유미’의 주변부를 맴돌며 알 듯 모를 듯 ‘유미’에게 친절을 건넵니다.
‘유미’가 ‘구웅’과 헤어지면서 ‘유바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미’와 사귀게 됩니다. 그는 언뜻 다정해 보이지만 낯설면서 동시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띠며, 그것은 ‘유미’와 오랜 시간 교제하면서도 지속합니다. ‘구웅’이 익숙함과 권태를 상징한다면, ‘유바비’는 생소함에서 오는 설렘을 나타냅니다(이후 설렘을 의미하는 ‘유바비’는 다른 사람에게 설레게 되어 ‘유미’와 헤어진다). 이렇듯 <유미의 세포들>에서는 연애관계에서 나타나는 만남과 헤어짐의 메커니즘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유미’의 세포들은 이 모든 연애의 과정을 만든 주역입니다. 세포들은 ‘유미’의 삶 전반을 관장하는 ‘행동대장’ 같은 존재입니다. 배고픔의 세포 ‘출출이’는 ‘유미’의 식욕을 담당하는, 주요 세포 중 하나이며 ‘유미’가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이성 세포’와 그와는 정 반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감성 세포’ 또한 존재합니다. 인생에 가장 큰 원동력을 관장하는 것은 프라임 세포인데, ‘유미’의 경우 그것은 ‘사랑 세포’입니다. <유미의 세포들> 이 로맨스 장르인 만큼, ‘유미’ 는 사랑을 통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세포들은 목적대로 프로그래밍이 된 기계들과 같아서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유미를 움직이려 합니다. 작게는 ‘세수 세포’부터 프라임 세포인 ‘사랑 세포’까지 ‘유미’가 해야 하는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에 있어 자신의 임무를 다합니다. 세포들은 두 가지 행동 양식을 갖습니다. 어떠한 상황이 닥쳤을 때 몇몇 세포들은 자신의 임무에 따라 ‘유미’를 반응시키려 합니다. 예를 들어 ‘유미’가 노을을 볼 때, ‘감성 세포’는 ‘유미’를 낭만에 젖어 일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한편, 다른 세포들은 ‘유미’가 처한 상황에서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최선 일지를 고민합니다. ‘본심 세포’와 ‘자신감 세포’가 결합한 세포인 ‘신의 한 수’는 유미가 곤란하거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애매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현명한 결단을 내리도록 도와주는 세포로, ‘구웅’에게 고마운 마음과 호감을 전하기 위한 방법을 떠올려냅니다. 세포들은 각기 이성의 영역과 감성의 영역을 드나들며 ‘유미’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애인과의 관계에서든, 세포들과의 관계에서든 결국 주체는 주인공인 ‘유미’입니다.
작품은 ‘유미’의 입장에서 인간관계를 바라보며 세포들은 오직 ‘유미’를 위해서만 움직입니다. 따라서 작품은 ‘유미’의 행복을 추적하게 됩니다. 교제 상대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유미’는 꿈속에서 간접적으로 세포들과 만나게 됩니다. ‘구웅’ 과의 연애가 흔들렸을 때, 유미는 본심 게시판에 “웅이는 운명이야”라고 적은 메모가 있는 걸 보고 게시판을 관리하는 세포에게 ‘구웅’이 자신의 남자 주인공 같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세포는 ‘유미’에게 남자 주인공은 따로 없으며 자신들에게는 ‘유미’만이 주인공이 라고 응수합니다. 또한 ‘유바비’와 이별할 때, 통제력을 잃은 ‘사랑 세포’ 앞에 ‘유미’가 나타나 자신은 연애를 하면 행복해질 것 같았기에 ‘사랑 세포’를 우선시했지만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라며 ‘사랑 세포’를 진정시키고 일반 세포로 되돌려 놓습니다. 이를 통하여 비록 <유미의 세포들>의 장르가 로맨스나 결국 연애는 ‘유미’의 행복을 돕는 주변부이지 그의 인생 전부가 연애로 점철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미의 세포들>은 뛰어난 흡인력을 보입니다. 등장인물이 입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 사실성을 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장점은 타 작품에서도 많이 보이는 특징이나, <유미의 세포들>은 시간의 흐름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돋보입니다. 보통 캐릭터의 입체성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에서 발휘됩니다. 싸울 때는 강인하지만 자신의 주변인에게는 다정한 식입니다. 그러나 <유미의 세포들>은 거기에 더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바뀌어 나간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구웅’의 경우 자신이 항상 모든 일에 있어 우선 순위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미’를 만나게 되면서 우선순위는 ‘유미’로 바뀌게 됩니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구웅’은 다시 ‘유미’에게 냉담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유미’는 ‘구웅’과의 이별을 겪고 일상을 살아가다가 다시 연애를 해야 할 순간이 왔을 때, 높은 관찰력을 습득하게 되며 한층 더 성장합니다. 상황에 따라 시간이 섬세하게 흐르면서 이것이 다시 다른 상황에 영향을 끼치도록 설계하는 것은 고도의 관찰력을 요구합니다. 이것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 때 사용되는 장치가 바로 세포들입니다. 세포들이 상호작용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등장인물들이 왜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뒷받침합니다.
역으로 세포들이 ‘유미’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에서 ‘전지적 유미 시점’이 작품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세포들이 주인인 ‘유미’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고, ‘유미’에게 유리한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세포들과 ‘유미’의 행동은 극중에서 정당성이 부여됩니다. 그러나 ‘유미’의 관점 밖에서는 ‘유미’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유바비’를 먼저 짝사랑하던 ‘유미’의 친구 ‘이다’의 사정을 알면서도 ‘유미’는 ‘유바비’와 사귀기로 결심하고 ‘이다’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기까지 합니다. 이는 작중에서는 세포들의 관점에서 정당한 일처럼 묘사되지만 다른 시점에서는 전혀 다른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포의 함정’은 작중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교묘합니다. 비록 작가가 ‘유미’의 관점에서 스토리를 바라보기를 원하고 있더라도 세포들이 다른 해석의 여지를 막아버리는 장치가 된다면 오히려 스토리의 중심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왜 연애를 할까요? 왜 ‘유미’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할까요? 건전하게 자신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로 인해 배려와 관찰력, 타인을 포용하는 법을 배우며, 나아가 스스로마저 성장시키기 때문입니다. 물론 연애가 서사의 중심축이 된다는 점에서 연애중심주의 혐의를 온전히 벗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미의 세포들>은 사랑이 중요한 이유를 위트 있는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이 작품의 의의는 “사랑이 밥 먹여주냐?” 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어준다는 것입니다.
2019 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작 : 신인 부문 가작 자유 평론 글 손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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