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억대 연봉을 받던 40대 변호사가 장난감을 갖고 놀기 위해 퇴직했습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팬에서 마니아로, 오타쿠와 덕후, 그리고 키덜트로 변화했습니다. 부정적으로 인식되던 오타쿠 문화가 덕후와 키덜트 문화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40대의 변호사 네이선 사와야가 어느 날 회사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이유를 들은 회사는 황당해했습니다. 그가 밝힌 퇴직 사유가 ‘장난감과 놀겠다’여서입니다. 그가 말한 장난감은 어린 시절부터 갖고 놀던 레고블럭입니다. 그는 다른 아이들이 그렇듯이 5살에 레고를 처음 만났습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놀았습니다. 엄마가 반려견을 사주지 않자 레고로 반려견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동차와 헬기, 건물로 확장해갔습니다. 그는 레고를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뭐든지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학에 입학하고, 변호사가 돼서도 이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터넷에 레고 관련 사이트를 개설했습니다.
그런데 이 웹사이트에서 네이선 사와야가 만든 레고 조립을 본 방문객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상을 레고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밤을 새워 레고를 조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주문이 폭주해 사이트가 다운되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되자 그는 레고 전문가로 나서기 위해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습니다.
초기에 네이선 사와야는 집세도 못내는 건 아닐까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3년 뒤 레고블록 최고 예술가가 됐습니다. 세계를 돌며 열고 있는 순회전시회에는 연간 200만 여 명이 방문합니다. CNN은 꼭 봐야 할 전시회로 꼽았으며, 미국 백악관에도 전시됐습니다. 애들이 갖고 노는 레고에 집중한 덕분에 이제 세계적인 아티스트 반열에까지 올라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네이선 사와야는 키덜트 문화를 예술의 경지로 올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애들이 갖고 노는 레고를 어른들이 선호하는 것을 키덜트 문화라고 하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는 덕후와 키덜트 문화가 응집된 사례인데요. 키덜트 문화는 국내만이 아니라 이미 세계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 팬 → 마니아 → 오타쿠 → 덕후
덕후는 한 가지에 매우 열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일본어 ‘오타쿠(オタク)’에서 비롯됐는데요. 원래 ‘당신’을 뜻하는 2인칭 대명사입니다. 하지만 어느새 한 대상이나 분야에 마니아 이상으로 빠져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변모했습니다. 단계로 구분하면 좋아하는 정도가 가장 낮은 단계가 팬이고, 그 다음이 마니아, 마니아보다 훨씬 강한 것이 오타쿠입니다. 오타쿠를 우리말로 ‘오덕후’로 부르다가 ‘덕후’로 줄여 부르고 있습니다. 파생어로 십덕후가 있는데, 오덕후는 덕후 정도가 오(5)라면 십덕후는 10정도여서, 두 배나 더 강한 셈입니다. 공자는 무엇을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팬에서 마니아로 다시 오타쿠, 그리고 덕후로 진화한 것은 문화 가치가 변함을 뜻합니다. 팬 문화 탄생은 자신의 기호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20세기인들의 자아 표현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니아보다 더 강한 오타쿠를 부정적으로 인식했습니다. 좋아하는 것에만 광적으로 집착해 다른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들로 간주했습니다. 또 사회성이나 대인관계가 잘 되지 않아 남에게 불편을 주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오타쿠 개념이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오덕후 나아가 덕후로 진일보했습니다. 한 가지에 완전히 빠져들지만 단순히 빠져드는데 머물지 않고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역량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자신만의 것을 고집하고 폐쇄적인 문화에 집착을 보이는 것과 거리가 있는, 사회적이고 대인관계도 갖춘 존재로 거듭난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취향을 표현할 수 있는 문화 통로와 채널이 디지털 기술로 가능해진 점도 주요했습니다. 키덜트 문화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린이 감성이라고 이상하게 취급하거나 백안시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키덜트 감성을 유지하고 이것을 발전시킨 이들이 있었습니다. 키덜드(Kidult)란 어린이(kids)와 어른(adult)이 합쳐진 말로 아이의 감성을 지닌 어른을 말합니다. 초기에는 키덜트 감수성을 미성숙한 어른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성숙해야 할 어른이 어린이 제품에 집중하는 정신적인 퇴행으로 바라봤다. 심지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약한 어른쯤으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정신의학계에서는 피터팬 신드롬과 견줘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 덕밍아웃
이런 부정적인 인식은 사회문화가 성숙되며 점차 긍정적으로 바뀌어갔습니다.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정신적인 위안을 얻기 위한 문화적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화다양성으로 인식이 바뀌고 개인의 문화 취향을 당당하게 밝혀도 용인되는 문화공화정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이에 촉매 역할을 한 것은 디지털 기술과 플랫폼의 발달입니다. 숨겨오던 키덜트 감수성이 인터넷을 통해 소수가 아니라 다수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에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사회와 융합하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대 들어서면서 덕밍아웃이라는 말이 유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덕밍아웃은 덕후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행동입니다. 무엇보다 배우 심형탁이 스스로 애니메이션 캐릭터 도라에몽의 덕후라는 것을 밝히면서 많은 이들이 덕밍아웃에 나섰는데요. 스타가 덕밍아웃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행동에 마니아 팬이 생기며 더 유명세를 얻는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키덜트 정서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폄하할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셈입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키덜트 문화가 단지 추억이라는 복고 문화 안에 있었습니다. 예컨대 어린 시절에 갖고 놀던 장난감이나 프라모델 조립하기, 딱지와 인형 놀이를 연상시켰습니다. 극장에는 로보트 태권V가 상영되고, 관련 피규어가 화제를 불러 모았습니다. 미국에는 미키마우스와 찰리브라운, 스누피, 심슨가족 등이 있습니다. 또 일본에서는 헬로키티와 포켓몬스터, 더 거슬러 아톰과 건담, 빨간머리 앤이 소환됐습니다. 장난감으로는 피규어 뿐만 아니라 프라모델, RC카, 레고, 미미의 인형놀이 등이 키덜트 문화의 중심으로 부상했습니다. 여기에 슈퍼마리오로 대표되는 가정용 콘솔게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 키덜트는 진화한다
이제 키덜트는 단순히 과거의 향수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고 키덜트 정서와 감성을 건드리고 담아내는 매개물을 계속 창출합니다. 때로는 색다르게 진화합니다. 어른과 아이 모두 갖고 싶은 드론이 대표적입니다. 또 슬라임과 나노블럭, 피젯 토이(피젯큐브, 피젯스피너, 피젯스틱), 카오마루 볼 등이 있습니다.
아이언맨 같은 캐릭터는 비록 오래된 마블 캐릭터지만 어벤져스 시리즈가 흥행을 하면서 다시 확장해 부활했습니다. 이제는 아이나 어른 모두에게 키덜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주자가 됐습니다. 키덜트 정서가 새롭게 생성되는 근원은 옛날처럼 텔레비전이나 극장, 신문, 잡지가 아닌 온라인 공간입니다. 스마트 모바일을 대표하는 소셜미디어(SNS)입니다. 이곳에서 동심을 자극하는 캐릭터가 이모티콘으로 새로운 키덜트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예컨대 카카오프렌즈와 라인프렌즈는 과거 캐릭터는 아니지만 세대를 불문하고 이 시간에도 키덜트 정서를 자극하는 아이콘으로 많은 파생 상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으로까지 확장해 물리 공간에서도 교감을 이어갑니다. 키덜트 상품 수입국에서 이제는 우리의 키덜트 상품들이 해외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이모티콘으로 친숙하게 만들며 키덜트 감성을 환기하고, 이것이 다양한 제품이나 상품과 결합해 해외와 오프라인으로 진출합니다. 글로벌과 디지털 융합으로 가능해진 현상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기업들도 키덜트를 겨냥해 이를 패션과 액세서리, 생활용품, 침구류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캐릭터업계와 뷰티, 패션산업, 리빙스타일, 편의점 등 일반 기업의 콜라보가 대세인데요. 예컨대 2019년 6월 휠라는 건담의 명장면과 캐릭터가 담긴 그래픽 티셔츠, 건담을 상징하는 3가지 색상의 트러콜로(레드, 화이트, 블루) 어글리슈즈, 취향 맞춤 연출 모자 등을 선보였습니다. 주방과 가전제품으로까지 콜라보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가전제품에는 영화 ‘스타워즈’의 마스코트 ‘알투디투(R2-D2)’ 로봇의 모양과 소리를 담은 로봇 청소기가 등장했습니다. 스파이더맨과 캡틴아메리카, 아이언맨 캐릭터 디자인의 작은 냉장고도 나왔다. 스누피와 찰리브라운 같은 캐릭터를 넣은 냄비나 그릇도 키덜트 주방용품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없어진 시대
전문 매장도 등장했습니다. 오프라인 매장 건담베이스를 비롯해 온라인 쇼핑몰 ‘올 어바웃키덜트’, ‘원피스’ 공식 카페 ‘카페 드 원피스’, 도토리숲, 뽈랄라백화점, DJI플래그십 스토어, 무민(MooMin) 공식 카페 ‘Moomin&Me(무민앤미) 등입니다. 무엇보다 당장 구매할 수 없더라도 작품처럼 전시회장을 통해서 다양한 키덜트 제품이나 캐릭터 상품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뮤지엄과 테마파크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 2014년부터 열리고 있는 서울 키덜트페어가 대표적인데요. 또 키덜트&하비엑스포, 경주키덜트뮤지엄 등이 있습니다. 범위를 좁히면 건프라엑스포, 둘리뮤지엄, 캐릭터라이선싱페어(Character & Licensing Fair), 피규어갤러리도 있습니다. 이렇게 온라인에만 있던 키덜트가 오프라인 공간으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직접 접촉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시대 흐름이 반영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다 보니 백화점에서 어린이용 장난감 매장 비중과 면적이 줄고, 키덜트 공간이 늘고 있습니다. 실제 대형 유통매장에서도 키덜트들이 찾는 드론이나 피규어, 프라모델 매출은 늘고, 어린이용 장난감 매출은 줄고 있습니다.
저출생 고령화 시대에 아이들은 점점 줄고, 이 틈새를 키덜트가 문화 산업 전반에 파고드는가 싶더니 장악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사실상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없어진 시대인 것인데요. 키덜트 문화 현상은 동심이라는 정서가 남녀 세대 불문이라는 점을 더 확증하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콘텐츠에서 동심을 먼저 생각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요즘 사람들은 상품에서 기능을 넘어 그 안에 담긴 감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저성장과 불확실성 시대가 이어질수록 키덜트는 세대를 통합하고 융화시키는 문화코드로 자리할 것입니다. 콘텐츠만이 아니라 산업경제에서도 큰 역할을 하는 주류문화로 거듭나며 21세기를 장식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레고 덕후 변호사처럼 개인이 소비자를 넘어 적극적인 크리에이터로 거듭나는 사례가 많아질수록 더 보편화될 것입니다.
글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이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 정기간행물 "N콘텐츠 14호"에 게재된 글을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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