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 부천 국제 만화축제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습니다. ‘만화의 미래’를 묻는 심포지엄이었는데요. 첫째 날 열린 ‘2030 : 만화의 미래’에서는 만화가이자 이 분야의 저명한 이론가인 스콧 맥클라우드가 단상에 섰습니다. 그는 2000년에 『만화의 미래』라는 책을 낸 바 있는데, 이 자리는 그의 예상이 얼마나 적중했고 빗나갔는지를 검증하는 자리라기보다는, 만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상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맥클라우드는 “한국의 웹툰은 '만화의 미래'의 예견에 가장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독자들은 페이지나 지면보다는 스크린을 하나의 창으로 인식하게 됐다. 언젠가는 독자가 작가에게 직접 고료를 지불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와 관련해 한국 웹툰 상황은 어떤지, 즉 광고 수익 중심인지 유료화 중심인지를 묻기도 하며 “어떻게 하면 이 산업에서 대안적 상품화가 가능할지 고민 중이다. 내가 예측한 것처럼 스크린을 창으로 보는 개념이 가장 빠르게 정착된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기술적 미래에 대해서도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습니다. 그는 “중요한 것은 만화에 기술을 적용할 때 사용자가 기술이 접목되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해야 한다. 모니터라는 창이 없어졌을 때 웹툰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가상현실(VR)을 언급했습니다. 기술은 이미 ‘VR 웹툰’을 현실화할 정도로 발전했다고 말한 맥클라우드는 웹툰의 미래에 관한 화두를 던진 것입니다.
한국의 웹툰은 정말 빠른 속도로 발전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포털 사이트의 엄청난 트래픽을 토대로 급격한 양적 폭발을 겪은 웹툰은 그 과정에서 여러 시도를 했습니다. 단순히 스크롤을 통해 프레임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웹툰은 인접한 매체나 테크놀로지를 끊임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옥수역 귀신 - 이미지 출처 : 호랑 작가의 ‘옥수역 귀신’ 웹툰 캡처
호랑 작가의 <옥수역 귀신>은 대표적입니다. 갑작스레 돌출하는 애니메이션 효과는 이 작품의 공포를 극대화하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프레임 안에 갇힌 고정된 이미지’라는 형식이 깨진 것입니다. 무적핑크의 <실질객관동화>는 증강현실(AR)을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숨겨놓고, 김민정의 <콘스탄쯔 이야기>는 동영상을 결합하기도 했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콘스탄쯔 이야기>는CCTV장면을 삽입하며 그 부분을 동영상으로 처리해 현실감을 높였습니다.
이외에도 사운드 효과를 추가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음악과 대사가 결합된 엔딩을 통해 TV드라마를 연상 시키기도 했습니다. 웹툰 기법 실험의 대표적 작가인 이종범의 <닥터 프로스트>는 3D로그린 배경을 사용하며, 캐릭터의 가상 SNS 계정을 만들고, 심리 테스트를 결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오창호 작가의 <러브슬립>은 연애 시뮬레이션게임의 포맷과 결합하였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웹툰은 전 세계 웹툰 문화의 전위에서 수많은 형식적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선은 이제 VR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심포지엄에 참석한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박인하 교수는 “VR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바 있는데, 지금까지는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최근에는 ‘가능할 수 있겠다’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웹툰이 지식 재산권으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투자자들에게도 다른 각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 변화가 계기가 되고 비용구조로 변환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획기적인 아이템이 등장해서 성취를 이룬다면, VR을 통해 특별한 지점을 성취할 수 있다”며 VR웹툰의 산업적 토대와 기술적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현재 VR과 웹툰의 결합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닙니다. 부천 국제 만화축제의 ‘만화+VR세미나’에서는 그 구체적인 미래가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서동일 볼레크리에이티브 대표는 “VR이 기존 웹툰의 플랫폼을 잠식하지는 않는다. VR은 하나의 디바이스일 뿐, 오히려 만화의 스토리에 더욱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신성장동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매체와 테크놀로지 사이의 시너지효과를 강조했습니다.
현재 웹툰 산업은 4차 산업혁명의 중요한 매체로 평가되고 있는데요. 올해 1월에 열린 세계적인 만화 페스티벌인 앙굴렘 국제만화 축체에 참석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오재록 원장은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고성능 대용량 스마트폰이 출시되고 LTE 등 고속 무선통신체계가 잡히면서 대용량 그림파일을 사용하는 웹툰이 날개를 달았으며 아직 실험 단계이긴 하지만, 작년 여름 부천 국제 만화축제에서 이미 VR과 결합한 웹툰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라는 말로 퀄리티와 규모의 관점에서 웹툰 산업이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전 세계 최고의 웹툰 강국인 한국은 이미 프랑스 내 최대 웹툰 서비스 업체인 델리툰에 한국의 웹툰을 수출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 업체인 다우기술과 협약을 맺은 상태이기도 합니다. 오재록 원장은 인터뷰에서 한국 웹툰에 대해 외국의 만화 관계자들이 지닌 높은 관심도 지적했습니다. “앙굴렘 국제 만화축제 사무국이 한국의 IT 수준이라면 VR과 웹툰을 융합한 콘텐츠가 있지 않겠느냐고 문의하며 내년에 꼭 전시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처럼 웹툰은 현재 다양한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을 통해 산업적 가능성을 가늠하는 중입니다.
영화 늑대의 유혹 - 이미지 출저 : 네이버 영화 <늑대의 유혹>
웹툰이 매체 환경의 변화와 기술적 시도를 통해 변모해 간다면, 웹소설은 현재 몇몇 장르를 통해 산업적 확장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작년에 1,000억 원 시장을 돌파한 웹소설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엔터테인먼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사실 웹소설의 근원을 살펴 올라가다 보면 1990년대부터 PC 통신에서 연재되던 『퇴마록』 같은 소설을 만나게 됩니다. 2000년 무렵 인터넷망이 빠른 속도로 깔리기 시작하면서 2000년대 초부터 ‘귀여니 현상’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소설이 쏟아졌습니다. 이후 판타지 등 특정 장르 쏠림 현상이나 질적 저하 등이 문제 되기도 했지만 2013년 네이버에서 ‘웹소설’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고 스마트폰이 급격하게 보급되면서, 양적 성장과 함께 거대한 마켓이 형성됐습니다. 웹소설은 이제 논란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하나의 안정된 시장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웹툰과 달리 유료 시장이 잘 조성되어 있는 웹소설은 현재 10여 개의 플랫폼을 중심으로 사용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최근 <오후 미디어> 기사에 의하면, 각 플랫폼은 다음과 같은 규모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네이버 웹소설은 로맨스 장르가 강세입니다. 성인용 콘텐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죠. 웹소설 전문사이트 문피아는 남성 독자의 비중이 높으며 현대 판타지가 인기입니다. 커뮤니티 게시판이 활발한 곳이기도 하고요. 웹소설/웹툰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조아라의 경우 남녀 유저의 성비가 비슷합니다. 이런 구성이 플랫폼의 인기 작품에도 반영되어, 남성 취향의 판타지와 로맨스 판타지가 공존합니다. 북팔은 성인 로맨스가 강세입니다. 특히 인기 있는 작품들 중에는 BL 장르(Boys’ Love, 여성을 위한 남성 동성애 물)가 많습니다. 이외에도 백합물(여성을 위한 여성 동성애 물)이 대세인 레진코믹스를 비롯해 전자책 유통업체 리디북스가 만든 리디스토리, 일본 라이트노벨이 전문인 스윗사이드, 성인물이 메인인 미 소설 등의 플랫폼이 있습니다.
웹소설과 그 미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건 ‘원소스 멀티 유즈’, 즉 ‘미디어믹스’ 현상입니다. 웹소설이 자체 시장 못지않은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원동력인데요. 일례로 최근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안 필름마켓에서도 웹소설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엔터테인먼트 지식재산권 마켓(Entertainment Intellectual Property Market, 이하E-IP마켓)에서 선정된 10편의 피칭프로젝트 중 7편이 웹 관련 콘텐츠였으며, 그중 두 편이 웹소설이었습니다. 2015년에도 10편 중 두 편은 웹소설이었습니다. 아직 웹툰만큼 강세를 띠진 않지만, 꾸준히 그 가치를 평가받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는 1990년대 말에 이미 이른바 ‘베스트셀러’로 상징되는 오프라인 대신 온라인에서 소스를 가져오기 시작했습니다. PC 통신 소설 <퇴마록>이 1998년 박광춘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고, <엽기적인 그녀>(2001)가 결정적인 모멘트를 만들었으며, 2000년대에는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와 <늑대의 유혹>(2004) 등이 ‘인터넷 소설 영화’ 붐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웹툰이 새로운 소스로 등장했는데 강풀 원작의 <아파트>(2006)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수많은 웹툰 원작 영화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소스가 웹소설입니다. 지난해 박보검과 김유정 주연의 TV드라마로 큰 인기를 끈 <구르미 그린 달빛>이 대표적입니다. 2014년 윤이수 작가가 네이버 웹소설에서 연재를 시작해 131회에 걸쳐 약 5,000만 뷰 이상을 기록한 이 소설은 2015년 열림원에서 5권짜리 세트로 출간해 좋은 반응을 얻었고, 2016년엔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역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웹소설-오프라인 소설-TV 드라마’라는 전형적인 과정과 공식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죠.
KBS2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 이미지 출저 :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홈페이지
SBS 드라마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 - 이미지 출저 : SBS 드라마 달의 연인_보보경심 려 홈페이지
이처럼 현재 웹콘텐츠 시장의 중요한 트렌드는 오프라인 시장이나 지상파 혹은 케이블 TV시장을 오가면서 ‘웹툰-웹소설-웹드라마’사이의 크로스오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원작이 되고, 하나의 소스가 다양한 매체로 확장됩니다.
영화도 뒤늦게 웹소설 시장과의 연계를 시도 중입니다. 최근 네이버 웹소설(플랫폼)은 쇼박스(영화 투자・배급사), 해냄 출판사(오프라인출판사)와 함께 ‘미스터리 공모전’을 열어 조정호 작가의 <휴거 1992>(최우수상)를 비롯해 모두 세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했습니다. “쇼박스는 모든 작품을 두고 영화화 가능성을 검토 중이다. 웹소설 분야의 상업화는 특히 중국에서 활발하다.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같은 영화 프로젝트를 비롯해 중국의 많은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중국과 외국 웹소설 IP를 사려고 혈안이며 텐센트, 아이치이 같은 그룹이 이끌고 있는 트렌드 속에서 웹소설은 웹드라마, 영화, TV 드라마, 게임 등으로 부지런히 증식 중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2016년에 매출 1,000억 원 시장으로 성장한 한국의 웹소설도 수 많은 콘텐츠의 원천이 될 거라는 것이 전반적인 진단입니다. 사실 플랫폼만 놓고 본다면 결코 중국에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관건은 어떻게 대중적 코드로 각색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대중문학으로서 강한 장르성을 띠고 있으며, 플랫폼을 통해 수많은 유저의 검증을 거쳤기에 대중의 욕구를 미리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웹소설은 분명 매력적인 콘텐츠입니다. 특히 서사구조에서 큰 장점을 지닙니다.
북팔의 김형석 대표는 “웹소설은 일반 소설과 달리 인물의 대사를 중심으로 서사가 구성되기 때문에 시나리오와 형식이 매우 유사하다. 그 때문에 각색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또한 한 작품 안에서 여러 번의 갈등 시퀀스가 반복되며 극의 긴장감이 엔딩까지 지속돼 몰입도가 높다”고 말했습니다. 대중 서사로서 웹소설은 뛰어난 흥행요소를 지니고있는 것 입니다. 웹소설은 아직 잠재력이 완전히 발휘되지 않은 블루오션이지만, 소스 콘텐츠 자체의 강점이 크기에 영화 등 다른 매체와의 결합에서 좀 더 큰 시너지효과를 낼 전망입니다.
웹콘텐츠 비즈니스의 핵심은 IP의 확장성입니다. 그런 점에서 웹툰이나 웹소설 등은 새로운 형태의 매체로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미 수많은 사례가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글 김형석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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