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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버린 방송판 근로환경’ : 미국의 사례로부터 얻는 시사점

by KOCCA 2017. 11. 16.

 

 

 

 

방송작가 서명숙 씨는 2008년 처음 방송작가로 발을 디뎠습니다. 서명숙 작가가 수습 기간 후 막내 작가로서 받은 첫 월급은 세전 100만 원, 세후 96만 원이었습니다. 힘든 방송 일을 버티며 어느덧 10년차에 접어든 서명숙 작가는 이제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메인 작가로 활동 중입니다. 경력 따라 임금이 오르며 경제적으로도 조금 나아진 것 같지만 방송작가 전체 임금 실태를 살펴보면 사정은 다릅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과 방송작가 유니온이 2016년 발표한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막내 작가의 평균 임금은 120 6 259. 150만 원을 넘는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100만 원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미지 출처 : 방송작가 노동인원 실태조사 보고서(2016)]

 

 

 

노동의 강도까지 고려해보면 더욱 암담합니다. 앞서 언급한 조사에는 장시간 노동에 대한 지적이 있습니다. 583명의 응답자(막내, 서브, 메인 전체) 가운데 주당 평균 노동일수가 6일 이상이라는 응답자가 41.9%, 심지어 7일이라는 응답도 13.9%에 이르렀습니다. 평균 주당 노동시간은 53.8시간으로 근로기준법상 노동시간인 40시간을 훌쩍 넘습니다. 이러한 평균 노동시간을 고려해 막내 작가 임금을 시급으로 따져보면 시간당 3 880원이 나옵니다. 최저시급 1만원이라는 구호가 방송작가들에게 더 큰 자괴감을 안긴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지요.

 

 

[이미지 출처 : 방송작가 노동인원 실태조사 보고서(2016)]

 

 

 

 

장시간 노동에 대해 많은 이들은 방송 업계의 특성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를 더욱 심화시키는 원인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방송사 측의 요구로 외주제작사가 적자를 감수하고 코너 개발과 제작에 매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공중파에 정규 편성 프로그램 하나를 유지하는 것이 외주제작사에게는 생존의 문제이다 보니, 그들은 방송사 앞에서는 불공정 계약의 피해자가 되는 한편 방송작가와 PD 등 일선 스태프들에게는 부당한 노동을 강요하는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방송제작 환경이 어려워지는 외부적 요인도 있습니다. 채널은 많아지고 인터넷 광고 시장이 커지면서 공중파라 할지라도 광고 수익은 줄어드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환경이 악화되는 가운데 방송제작 스태프들의 노동인권을 보호할 장치는 사실상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프리랜서, 즉 특수고용직인 방송작가를 비롯한 대다수의 스태프들은 노동법조차 적용 받지 못 하고 있습니다. 수당 없이 주7일 근무를 지시해도, 필요에 따라 상품권과 같은 현물로 임금을 지불해도 근로 감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방송사 정규직 보다는 비정규직 프리랜서가, 메인 작가보다는 막내 작가가 더 약한 사람들이 어려운 시기에 더 많은 희생과 인내를 강요 받고 있는 셈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대부분의 방송작가의 경우 바로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명숙 작가 역시 지금껏 계약서를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면접에서 임금과 스케줄 등은 안내 받지만 별도의 계약서는 쓰지 않고 업무를 시작했고, 만약 경력에 꼭 필요한 프로그램이라면 임금을 묻지도 못하고 일단 일을 시작한 뒤 지급일에 닥쳐서야 통보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임금을 비롯해 고용과 해지, 업무의 범위까지 암묵적인 업계 관행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무계약 관행으로 발생하는 또다른 문제는 임금 체불입니다. 방송이 연기되거나 외주제작사가 제작비를 제대로 받지 못해 스태프들의 임금이 체불되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노동청에 신고해서 구제받을 수 있지만 방송작가들은 신고를 했어도 계약서가 없어 근로를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한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계약서를 쓴 작가들 역시 공정한 노동계약을 맺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 대형 외주제작사의 용역 계약서를 살펴보면 기준 시청률이 3회 이상 미달할 경우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할 수 있다는 계약해지 조항, ‘제작 과정에서 제3자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했을 경우 그 책임을 오로지 을(방송작가)이 책임져야 한다는 조항 등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불공정하지만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는 작가들이 적지 않을 것이고 발생하는 피해는 개인이 홀로 감당해야 합니다.

 

 

[이미지 출처 : 방송작가 노동인원 실태조사 보고서(2016)]

 

 

 

 

미국의 경우 한국 영상제작 노동시장과 결정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합리적 거래관행이 제도화되어 영상제작 노동시장에서의 불확실성 요소들로 인한 위험 부담을 각 영역이 나누어 갖는다는 점입니다. 방송사는 제작사에게, 제작사는 스태프에게 위험을 더 많이 떠넘기는 방식이 아니라, 계약서를 통해 각자가 보호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프로젝트형 고용시장에서 숙련 스태프에서부터 신입 스태프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역량에 맞는 정당한 노동의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계약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부분이 미국에서는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습니다. 예전부터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달됐던 미국에서는 1890년대부터 1930년대 걸쳐 공연과 영화 산업에서 창작자와 스태프들의 노동 계약에 대한 합리화 과정이 시작되었고, 이는 오늘날 방송,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에 걸치 노동 계약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미국 영화,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는 각 영역의 스태프는 감독길드,  배우길드, 작가길드, 스태프연맹 등 관련 협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협회를 통해 제작 전문 종사자로서의 권리를 보호받고 있습니다.

 

 

 

 

 

 

미국 협회의 협약서는 기본적으로 최저임금을 보장함으로써, 사용자가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이용하여 근로자에게 부당한 계약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감독길드의 경우, 감독 임금의 최저수준을 방송프로그램의 장르, 프로그램의 길이 등을 기준으로 책정해 두었는데요. 장르는 드라마, 버라이어티, 퀴즈 및 게임, 스포츠, 뉴스 등 세부적으로 나누어 적용합니다. 프로그램 길이 기준의 최저임금은 15~30분 기준으로 책정하고 있으나, 2시간을 초과하는 프로그램에서는 2시간 수당에 초과분을 시간당으로 더해 적용합니다. 작가길드에서 정한 최저보수도 시간에 따라 차이가 있고, 에피소드인지, 파일럿인지 등에 따라서 다르게 책정합니다. 
보수의 지금은 가능한 한 납품 후 48시간 이내 지급하도록 하며, 7일을 넘을 수 없다고 정해 놓았습니다. 대본의 경우, 초고와 최종본에 분할 지급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뉴미디어 파생상품의 경우에도 기본2분으로 보수를 책정하고, 2분 초과분에 대해서는 다른 가격을 책정하여 계산하고 있습니다. , 재방송 시에 지급되는 방식도 회차에 따라 차등적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방송 산업에서 창작자 및 스태프의 계약조건과 근무환경을 얘기할 때 본질을 흐리는 세 가지의 잘못된 논거가 자주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제작현장의 여건상 일일이 계약서를 쓰면서 일하는 것은 번거롭다는 논리 입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5 방송분야 표준계약서 실태조사 보고서>(2016)을 참고하면, 제작 스태프와의 계약에서 표준계약서를 활용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독립제작사 중 그 이유가 구두 계약이 관행이어서 38.3%로 가장 높았으며, ‘제작사 자체 계약서로 계약하는 것이 관행이어서’(36.7%)가 그 다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구두계약을 하거나 제작사 자체 계약서를 사용하는 것은 갑에 해당하는 기업이나 사용자 중심의 효율성만 고려한 것이고, 을에 해당하는 기업이나 근로자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 관행입니다. 미국 사례를 살펴보면 작업에 참여한 모든 스태프들은 계약서를 작성하고 작업에 참여합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보장될 때, 우수한 인재가 유입되어 콘텐츠 산업의 전반적 수준이 향상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 2015 방송분야 표준계약서 실태조사 보고서(한국콘텐츠진흥원)]

 

 

두 번째는 스태프 근로 여건의 열악함이 프리랜서와 계약제 근무에 기인하다는 논리입니다. 프로젝트형 고용이 중심이 되는 영상제작에서 프리랜서와 계약제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그들을 보호할 장치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는 데서 문제를 찾아야 합니다. 고용의 형태를 떠나서, 4대 보험, 저작권 보호, 시간 외 수당 등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근로여건을 개선해야 할 것 입니다. 미국에서도 각 영역의 모든 스태프는 협회의 규약을 벗어난 계약을 할 수 없으므로, 큰 틀에서는 협회 규약의 보호 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중견급 스태프의 높은 보수와 말단 스태프의 보수를 비교하면서 다수 스태프의 근무여건이 열악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중견스태프와 말단 스태프의 보수 차이가 아니라 말단 스태프까지도 각자의 근무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보호해줄 수 있는 계약이 대개 부재하다는 점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의 병폐를 관행이라는 이유로 덮지 말아야 합니다. 방송계가 동료들이 떠나고 후배들이 오기를 꺼리는 일터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의 사례로부터 얻은 것들을 토대로 문화콘텐츠의 창작자이자 방송 노동자인 작가와 제작 스테프를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 신호등이 켜지기를 바랍니다.
 

 


글 서명숙(방송작가), 임정수(서울여자대학교 언론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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