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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와 맨부커상, 그리고 당신

by KOCCA 2016. 5. 25.

 



그러니까 벌써 8년 전의 일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굴지의 대기업 최고경영자 인터뷰를 하러 집무실을 찾았죠. 환한 유리창 밖으로 청와대가 슬쩍 보이는 그런 멋들어진 곳이었습니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의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질문이 뭐였는진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기억나는 건 오로지, 답일 정도로 충격이 상당했습니다. 되짚어 보면 취미쯤을 묻는 그런 평범한 질문이었을 겁니다.

 

여름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한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지만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 있으나 석윳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죽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중략)” 


맞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이었습니다. 교과서에 등장하고, 제가 학교를 다니던 때엔 대학수학능력시험에도 나올 정도로 그 유명한이야기가 귓전을 때렸습니다. 다소 투박한 경상북도 사투리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구성지게 들렸습니다. 청각으로 전해지는 여름 장날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달빛 쏟아지는 메밀밭이 불쑥 머릿속을 채웠지요.

글을 외워 향유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궁금했습니다. 매년 봄이 돌아오면 지리산에 올라 지인들과 달이 뜨는 밤에 돌아가며 글을 입으로 들려준다는 답에 더는 묻질 못했습니다. 즐거운() 놀이라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렇게 인터뷰를 하고 돌아와 그날 밤 다시 이효석(1907~1942) 단편집을 펼쳤습니다.

◀ 만화 <메밀꽃 필 무렵>   




<메밀꽃 필 무렵>을 들려줬던 올해로 71세를 맞은 신헌철 서울시립교향악단 이사장과의 만남을 떠올린 건 순전히 뉴스 때문이었습니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노벨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힌다는 맨부커상(Man Booker Prize)을 받았단 이야기였죠. 고백하건대 비늘 쓰인 저의 눈엔 이 책은 사실 고통스러웠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아름답지만 음울한, 절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놓아버리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마음을 짓눌렀기 때문이었지요. 도대체 왜, 이 여성은 삶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것도 음식을 거부하는 것으로란 지극히 단편적인 제 물음의 답은 이렇게 튀어나오더군요.



                                                                            도서 <채식주의자> ▶



‘...언닌 알고 있었어?'

대답 대신 영혜는 물었다.

'.... ?'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 저거 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중략)'


-한강, <채식주의자> 중 일부 발췌

 

물과 빛만을 먹고서도 땅을 받치고 살아가는 나무가 된 여자의 이야기로 다시 책을 읽어 내려갔을 땐 묘한 희열이 일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 책은 10년 전 구상된 이야기에서 가지를 뻗어 나왔습니다. 소설가 한강 씨가 밝힌 대로라면 2002년 겨울부터 시작된 중편의 이야기가 엮여 각각의 중편과 다른 이야기가 되는 조합으로 탄생했다고 합니다. 각각 완성된 이야기들이 퍼즐조각처럼 맞춰져 또 다른 이야기로 재탄생된다니 원고지 앞에서 오랜 시간 씨름을 했을 작가의 노력과 필력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2007년에 지금처럼 한 권의 형태로 묶여 나왔던 이 책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게 된 건 조력자의 힘이 컸습니다. 벽안의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28)였습니다. 영국인인 그녀는 혼자서 한국어를 공부해 이 책을 나름의 방식으로 즐겼던 모양입니다. 그의 손에서 영어로 옮겨지지 않았던들 한국 문학계에 전례 없던 이 같은 단비가 내리긴 어려웠을 겁니다. <엄마를 부탁해>로 해외에도 이름을 알린 소설가 신경숙 씨의 표절 논란으로 체면을 구겼던 문단과 목말랐던 출판계가 크게 반색하고 나설 정도로 말이죠.

 

 

시상식이 열리는 영국과 바다 건너 이 땅과의 시차마저 고려한 한강 씨의 <깊이 잠든 한국에 감사를 보낸다>는 수상 소감이 전파를 탈 즈음 전해진 다른 이야기가 있었지요.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유명한 시인 최영미(55)씨의 이야기였습니다. 생활보조금을 받게 될 정도로 빈궁한 시인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글을 써서 밥을 벌어먹는 일이 쉽잖은 것은 맞습니다만, 보조금을 탈 수준으로 궁핍과 다투는 시인의 모습은 또 다른 고민을 불러오더군요. 게다가 세계를 호령하는 굴지의 IT(정보기술) 공룡인 구글이 이제는 인공지능(AI)알파고에게 말을 가르치고 있다지 않습니까. 로맨스 소설을 쓰는 작가의 자리마저 알파고에게 넘겨줘야 하는 것일까요.

 

◀ 도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




웹 소설로 연봉 1억 원을 버는 작가도 있다는데, 왜 유명 시인은 밥을 굶을까요. 왜 작가들의 희비는 교차하는 것일까요스토리텔링이 가져다주는 확장성은 무한합니다. 이 스토리텔링이 돈이 되느냐 마느냐는 향유하는 자들이 얼마나 무리지어 있느냐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최영미 시인의 비보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려있더군요. ‘그간 먹고 사는 데 정신없어 자기계발 서적이나 들춰볼 뿐 문학 서적과 담을 쌓고 지냈다는 탄식이었지요. 서점들은 앞다퉈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그의 전작들을 알리기에 나서고 있지요, 이 바람이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요. 대학입시처럼 목적이 있는 글 읽기로만 우리의 문학을 봐오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온 것은 아닌가요. 정작 우리는 우리 글을 즐기는 방법조차 잊은 채로 말이죠. 열쇠는 우리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웹 소설 시장이 폭증할 수 있는 스낵컬처를 만든 이가 우리인 것처럼요.

 



스토리헬퍼


기왕에 이야기에 대한 잡설을 늘어놨으니 첨언할 게 하나 있습니다. 설을 배우기 시작한 알파고와는 좀 다릅니다만, 글쓰기를 좋아하는 분이시라면 참고할 만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스토리헬퍼란 소프트웨어입니다. 소위 되는 이야기들을 데이터베이스로 삼아 이야기의 틀을 잡을 수 있도록 한 프로그램입니다.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니, 혹 작가를 꿈꾸는 분들은 한 번쯤 들여다보시는 것은 어떠하실지. 백수 시절에 커피숍을 들락거리다 끄적인 소설이 억만장자가 되게 했다는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 같은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사진출처

표지사진 <채식주의자>, 만화 <메밀꽃 필 무렵> 이미지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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