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산업과콘텐츠 편집부>
음악은 시대의 거울이고,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한 ‘나그네의 설움’과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귀국선’부터, 경제성장을 자축한 ‘서울의 찬가’와 당시의 청년 문화를 고스란히 담은 ‘아침이슬’, 청소년을 대변하는 ‘교실이데아’와 88만 원 세대의 송가라 불리는 ‘싸구려 커피’에 이르기까지. 삶을, 그리고 문화를 반영하는 사료로서 대중음악은 무엇을 기록해왔을까요?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중략)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
1989년에 발표된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는 호젓한 당시 정동 인근의 풍경을 선명하게 그려냈습니다. 사실 그로부터 25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정동의 풍경은 노랫말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광화문 연가’의 가사 그대로의 풍경을 만나게 돼 새삼 왼쪽 가슴이 뭉클해지는 미묘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노랫말에 비친 과거의 풍경은 이렇듯 생생해서, 때로는 노래를 통해 내가 몰랐던 시절로 순식간에 회귀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에는 ‘명치좌 구경갈 땐 혼자만 가구’라는 가사가 등장합니다. 1938년, 명동은 우리나라를 통틀어 가장 도시적인 곳이었고, 지금의 명동예술극장을 가리키는 명치좌(明治座)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박향림의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를 들으면 그때 그 화려했던 명동 거리가, 그리고 어린 동생을 떼어놓고 혼자만 번화가로 나들이를 가는 ‘모던보이’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대중가요가 기록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추억이나 풍경만은 아닙니다. 노랫말을 통해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것은 바로 시대적인 기조와 사회의 변화상입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정처 없는 이 발길 (중략) 옛님이 그리워도/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라는 가사로 당시의 아픔을 묘사한 이 노래는 나라 잃은 민족에게는 위안이었고, 후일을 기약하는 의지의 발로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설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1945년, 마지못해 조국을 떠났던 동포들이 귀국선에 몸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1949년 발표된 이인권의 ‘귀국선’은 ‘돌아오네 돌아오네/고국산천 찾아서/얼마나 그렸던가/무궁화 꽃을’이라며 광복의 기쁨으로 가득 찬 당대 사회상을 노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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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전쟁이라는 부침의 역사를 겪으면서는 ‘울어라 은방울’ ‘전우야 잘 자라’ 같은 노래가 널리 불렸고, 재건의 시기라 불리는 1960년대에 들어서는 빠른 템포에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노래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명숙이 부른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1961)는 전국에 노란색 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직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던 그때, 먹고사는 일이 지옥 같았다던 시절, 산업화와 서구화를 향한 열망이 노래를 통해 발현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조는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종이 울리네/꽃이 피네/새들의 노래/웃는 그 얼굴’이라고 경쾌하게 노래했던 패티김은 ‘아름다운 서울’에 살겠노라며 가파른 경제성장을 시작하던 당시를 기록했습니다.
초창기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가 트로트였다면, 1970년대를 전후로 주류를 형성한 것은 팝송과 포크송, 록 음악 같은 청춘의 음악이었습니다. 팝송의 유행은 미군의 주둔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데, 패티김・조용필・신중현을 비롯한 당시의 인기 가수들은 대부분 미8군에서 공연을 하며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팝송이 대중화하면서 청년들은 포크송과 록 음악을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격변의 시기였던 1970~80년대, 자유를 외치던 청춘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 바로 음악이다. 양희은의 ‘아침이슬’, 이장희의 ‘그건 너’, 김세환의 ‘길가에 앉아서’, 송창식의 ‘고래사냥’,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등은 그 시절 젊은이들의 희망과 저항, 사랑과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주옥같은 명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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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날 청춘의 모습은 대중음악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2005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Ex의 ‘잘 부탁드립니다’는 동시대 청년들의 구직난을 익살스러운 가사로 풀어내 화제를 몰고 왔습니다. 혜성처럼 등장한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2008)는 ‘잉여’라고 부를 만한 청춘의 슬픈 자화상을 담아냈습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어쨌든 ‘눅눅한 비닐 장판에/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중략)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라는 자조적인 가사의 이 곡은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으며 ‘88만 원 세대의 송가’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가히 가요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할 수 있습니다.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데 다소 소외됐던 청소년을 주요 소비층으로 끌어들였고, 스타 시스템 등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판도를 만들어냈습니다.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전국구 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중략)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주겠어/네 옆에 앉아있는 그 애보다 더/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
시대에 대한 유감을 거침없이 외치며 청소년의 마음을 대변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1994)는 기성세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청소년에게는 해방구와도 같았다. 그런데 이런 문제 제기가 현실에서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던 걸까요? ‘교실이데아’ 이후 20년이 흐른 지금도, 청소년의우상이 부르는 청소년의 현실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은 ‘No more dream’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꿈 따위 안 꿔도 아무도 뭐라 안하잖아/전부다 똑같이 생각하고 있어 (중략) 대학은 걱정 마/멀리라도 갈거니까’. 획일화한 교육 아래 무기력해지는 10대의 모습을 표현한 이 곡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묵직한 경고처럼 느껴집니다.
무거운 학원가의 현실과는 반대로, 대중가요 속에 드러난 사랑의 양상은 비교적 스펙터클하게 변화했습니다. 1970~80년대의 사랑 노래는 대부분 ‘진실된 사랑’ 그 자체를 주제로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미워도 다시 한번’은 헌신적인 사랑을, 윤형주의 ‘라라라’는 조개 껍질을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
에 앉아 밤새 속삭이기만 하는 순수한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부터는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는 가요가 많아졌습니다. 015B의 ‘신인류의 사랑’은 자유분방한 신세대의 사랑 이야기를,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는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멜로디에 담았습니다. 삐삐세대라고도 불리는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사랑은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랑해’를 의미하는 ‘486’이 나오는 노랫말도 왕왕 들을 수 있었고, 이승환의 ‘1,000일 동안’이나 젝스키스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삐삐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노래도 많았습니다.
지난봄, 소유와 정기고의 듀엣곡 ‘썸’은 각종 음원 사이트의 차트에서 1위를 휩쓸었습니다. 사랑을 시작하는 남녀의 설레는 마음을 재치 있는 가사로 풀어낸 이 곡은 정식으로 연인이 되기 전 ‘썸’을 타는 요즘 젊은 세대의 새로운 사랑 방식을 보여줍니다. 젊은이들의 폭풍 같은 공감을 얻은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라는 노랫말은 과거와 현재의 사랑 방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세태가 달라졌다 해도 ‘사랑’은 여전히 대중음악의 단골 소재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습니다.
▲ 사진3
악동뮤지션의 ‘지하철에서’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옵니다.
‘북적북적이는 출퇴근 시간/정장 교복 할 거 없이 빽빽한/내가 들어서면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버린 전동차의 풍경(중략) 스마트폰을 한 손에 쥐고 덜컹덜컹해요/비틀비틀해요/게임하는 남자들 홈피하는 여자들/이어폰을 꽂고 덩실덩실하는 청년들’. |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누군가 이 노래를 들으며 ‘아, 이 당시의 지하철 안 풍경은 이랬구나’ 하며 빙긋 웃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 음악 속에는 당시의 삶과 문화가 고스란히 묻어 있습니다. 음악은 우리에게 친근한 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또한 ‘음악은 삶의 변주’라는 말처럼, 대중음악은 결국 대중의 삶에서 비롯됩니다. 이 시대의 노래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공존하는 관계이기에, 대중가요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유행가’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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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 MNET, 창조산업과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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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정기간행물 <창조산업과 콘텐츠> 7·8월호(http://bit.ly/1q0z7tR)에서 발췌하였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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