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반.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너편에 배낭을 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편안한 복장에 가벼운 걸음걸이. 여행객의 차림새를 한 이들은 한국방송작가협회 건물 앞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다양한 연령대와 고른 성비, 얼핏 보기엔 공통점을 찾기 힘든 집단이다. 안면이 있는 듯한 몇몇이 가벼운 인사와 담소를 나누는 동안 빨간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줄지어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 잠시 부산스런 시간이 흐르고 출발 준비가 끝난 듯 문이 닫혔다. 버스는 남쪽을 향해 기세 좋게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떨어지던 비는 어느새 그쳤고 어둑어둑하던 하늘은 하얗게 밝아왔다. 구름 사이로 빠져나온 햇빛 한 조각이 버스 앞유리에 붙은 종이로 떨어진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한국적 문화자원을 활용한 소재개발 워크숍'
▲사진1 - 1박2일의 여정을 책임진 든든한 버스. 그리고 멋진 기사님
8월 19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한 한국적 방송 소재 개발 워크숍이 개최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취지는 활동 중인 작가, 예비 작가, 기획 PD 등 방송 창작자를 대상으로 콘텐츠 아이디어 발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인데요. 우리 역사와 전통이 깃든 현장 체험 장소로 선정된 남해, 평창, 중국 돈황. 그중 1차인 남해 워크숍에 저 또한 기자단 자격으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전원일기>의 김오민 작가, 영화 <편지>의 신선희 작가, <건축학개론>과 <부러진 화살>의 권양헌 PD, 드라마 <그래도 당신>의 박언희 작가 등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작품의 창작자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또 그분들을 인터뷰해야 한다는 사실이 기대 반 부담 반으로 다가왔는데요. 저의 젊음의 열정(?)을 좋게 보셨는지 다들 친근하게 대해 주셨답니다.
▲사진2 - 남해대교
스무 명의 작가들과 한국콘텐츠진흥원 직원 둘, (주)브레인파크 직원 셋까지 태운 버스는 여의도에서 꼬박 반나절을 달려 남해대교에 도착했습니다. 1973년 이 다리가 세워지기 전까진 배를 타고 남해와 육지를 오가야 했다고 합니다. 다리가 놓인 이곳이 바로 노량해협,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버스가 달리는 시간을 이용해서 작가분들에게 간단한 인터뷰를 부탁했습니다. 흔쾌히들 답변해 주셔서 참 감사했지요.
Q1> 소재개발 워크숍에 참여해 주셨는데요. 생활 속에서 이야기 소재를 얻는 작가님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다면?
A1> 박현향 작가님 : <남희석, 이휘재의 한국이 보인다> 음악극 <천변살롱>
- 생각을 많이 한다. 책과 영화를 통해 얻는 되는 단어, 말들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는다.
A2> 김보현 작가님 : <창작뮤지컬 트루먼쇼>
- 기구운동 할 때, 그리고 버스 안에서 졸리기 직전에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A3> 황초헌 작가님 : 라디오<양미경의 가요산책><태진아의 대한민국 가요 쇼>
- 시집을 읽을 때 떠오른다.
A4> 김기란 작가님 : <동양다큐>
- 신문기사나 현장에 직접 가서 전문가를 만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듣고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A5> 신선희 작가님 : <햇빛사냥> 영화<편지>
- 차 타고 갈 때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지 않는 편인데, 그렇게 생각 없이 멍하니 차에 실려가는 도중에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른다.
A6> 김한석 작가님 : 드라마<질주> 휴먼다큐멘터리<병영일기> 장편소설 <아내> 등
- 경험한 문학작품들이 머릿속에 자연스레 체화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때 떠오른 것을
나만의 것으로 만드는 검증과정을 거친다.
1#. 남해유배문학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남해 워크숍의 첫 번째 탐방지, 유배문학관에 도착했네요.
▲사진3 - 남해유배문학관 전경
남해유배문학관은 국내 최초 및 최대 규모의 문학관으로, 유배와 유배문학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습득을 위한 전문공간입니다. 유배라는 절망적인 삶 속에서도 문학과 예술의 꽃을 피웠던 유배객들의 정신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남해읍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기도 하죠.
문학관에 들어서자마자 전문 해설사님이 인솔을 맡았습니다. 유배문학관의 양소유(소설<구운몽>의 주인공, 일부다처제의 아이콘)란 별명을 가지신 해설사님의 위트 넘치는 설명 덕분에 향토역사실, 유배문학실, 유배체험실, 남해유배문학실을 한결 알차게 관람할 수 있었답니다. 해설을 굉장히 집중해서 듣는 틈틈이 메모까지 빼놓지 않는 작가분들의 진지한 모습이 제겐 굉장히 인상적이었죠. 이렇게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한 집단 속에서 해설을 듣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진4 - 유배 문학실
유배 문학실에서는 대나무숲에 흐르는 바람 소리와 함께 유배객의 간절한 시구를 음미해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전 세계의 유배 문학에 대한 설명도 만나볼 수 있었죠. 나폴레옹, 넬슨 만델라, 소동파 등 유배형을 겪었던 많은 이들이 훌륭한 작품을 남겼는데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사도 요한의 <요한계시록> 역시 유배문학의 일종입니다.
▲사진5 - 조형물 <생사의 기로>
가장 인상 깊었던 조형물 <생사의 기로>입니다. 백척간두에 선 유배객의 심정을 흑과 백의 대비를 통해 나타내고 기약 없는 유배 살이, 실낱같은 삶의 희망을 동아줄로 표현한 작품인데요. 가운데 보이는 좁은 유리창을 향해 유배 가는 심정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다 보면 유리 너머로 나타나는 유배객의 형상을 만날 수 있답니다.
▲사진6 - 유배체험실, 곤장
유배체험실은 유배객의 삶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작은 테마파크인데요. 직접 주리를 틀려 보거나 곤장을 맞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소가 끄는 함거를 타고 유배 길을 떠나는 4D 입체영상도 준비되어 있는데요, 아쉽게도 상영 준비 중이라 체험해보지 못하고 지나쳤네요.
유형은 태(笞), 장(杖), 도(徒), 류(流), 사(死)의 다섯 가지 형벌 중 사형 다음으로 강력한 형벌입니다. 따라서 유배를 보낼 때도 단순히 먼 곳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출발하기 전 곤장을 수백대 치고 나서 일부러 먼 길로 빙빙 돌아 목적지로 향하도록 했답니다. 그래서 험난한 여정 중에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네요.
▲사진7 - 남해유배문학실, <사씨남정기> 한글 필사본. <구운몽>과 더불어 서포 김만중의 대표작이다.
남해유배문학실에서는 자암 김구, 서포 김만중, 약천 남구만, 소재 이이명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배객들의 문학을 만나볼 수 있었는데요. 권력과 부귀를 잃고 변방으로 쫓겨난 선비들은 그 절망과 아픔을 오히려 예술로 승화시켰다고 합니다. 사실 벼슬에 있는 동안에는 정치하느라 바빠서 문학작품을 쓸 시간이 없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작품을 쓴 문인들은 대부분 유배를 다녀온 이들이라고 합니다. 유배 덕분에 고전 문학사에 획을 긋는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사진8 - 유배문학관 김성철 관장의 강의
문학관 관람이 끝난 뒤, 우리는 강당에 모였습니다. '구운몽의 낭만과 자유'라는 주제로 명사특강이 준비되어 있었는데요. 10년간 유배문학을 연구해 오신 유배문학관 김성철 관장님이 강단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대제학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지만, 당쟁에 휘말려 강원도 고성으로, 평안도 선천으로, 남해의 작은 섬으로까지 유배를 다녀야 했던 김만중의 파란만장한 유배 생활. 임금을 사모하고 충심을 강조하는 대다수의 유배 문학과는 달리, 당시 임금이었던 숙종에게 새로운 시대를 요구했던 그의 풍자적인 문학 세계에 대한 설명은 들을수록 흥미로웠어요. 한 시간 반가량 이어진 강의는 질의응답 시간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버스에 몸을 싣고 이동하는 동안, 막간을 이용해서 인터뷰를 계속 진행했습니다.
Q2> 콘텐츠 소재로서 김만중의 삶과 그의 작품 <구운몽>,<사씨남정기>에는 어떤 매력이 있는지?
A1> 권양현 PD님 : <부러진 화살>, <건축학개론>, <마당을 나온 암탉>, <7광구> 등 예고편 제작
- 대부분 임금을 위주로 사극을 만드는 현실 속에서 <허준>, <대장금>같은 드라마에 제작되기도 하듯, 김만중 또한
재조명될 수 있는 드라마틱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A2> 김한석 작가님 : 드라마<질주> 휴먼다큐멘터리<병영일기> 장편소설 <아내> 등
- 숙종과 김만중을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다.
A3> 김오민 작가님 : <전원일기>, <인간극장>
-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에 대해 현대적으로 다루고 싶다. 또한, 비극일 수 있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를 코미디로
만들어보고 싶다. 외도에 빠져 쉽게 이혼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결과적으로 다시 재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신중함과 책임감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A4> 김영주 작가님 :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생방송 좋은 아침입니다>
- 김만중의 문학은 유배문학의 꽃이다. 절망적 상황을 뛰어넘는 이러한 '능절문학'을 시간을 초월해서 현대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독하고 늘 힘든 현대인들에게 어려운 시절일수록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을, 그 꿈을 실현해
나가는 이야기를 통해 보여 주고 싶다.
2# 국제탈공연예술촌
우리는 다음 현장체험 장소인 국제탈공연예술촌으로 향했습니다.
국제 탈공연예술촌은 남해군에서 설립·운영하고 있는 예술창작 및 연구지원기관인데요. 폐교를 리모델링해서 탈 전시관, 기획전시실, 공연예술전문도서관, 다초실험극장을 갖춘 다목적 공간으로 탄생시켰다고 합니다. 국내외에서 발간된 전문서적, 세계 탈, 영상자료, 각종 미술품 등 총 25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니 참 대단하죠?
▲사진9 - 탈 전시실
2층 탈 전시실엔 형형색색의 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고등학교 때 배우는 <봉산탈춤>이나 드라마<각시탈>로 익숙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다른 곳에서 이름조차 접해 보지 못한 탈들이 많았습니다. 세계 40여 국의 700여 개 전통 탈들이 걸려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해설사님이 들려주시는 전통 탈과 보물섬 남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탈은 액을 쫓고 복을 부르기 위해 무섭게 만드는 게 일반적이지만 우리 하회탈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죠. 해설사님은 이것을 선조가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로 해석하셨습니다. '긍정적인 이미지로 살 것인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살 것인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사진10 - 기획전시실
기획전시실 한쪽 벽은 한국 고전 영화와 연극에 참여했던 배우들의 사진들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각종 뮤지컬 포스터, 팜플렛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이 모든 것은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장을 지냈던 김흥우 교수님이 평생 모아온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다양한 저서와 작품집을 출간하고 지금은 국제탈공연예술촌의 촌장을 맡고 계시는 김흥우 교수님께서는 우리를 마지막까지 따뜻하게 배웅해 주셨습니다. 직접 사인해 주신 촌장님의 산문집 <남해안의 행복한 삶>. 소중히 간직할게요.
▲사진11 - 국제탈공연예술촌 앞에서 김흥우 촌장님과 함께
방송작가님들과 함께한 '한국적 문화자원을 활용한 소재개발 워크숍'. 그 첫날 일정은 남해의 아름다운 낙조 속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공식 일정이 끝난 뒤 남해의 해산물을 맛보며 담소를 나누는 화합의 시간이 오래도록 이어졌는데요. 다음 날 아침부터 잡혀 있는 일정 때문에 다들 아쉬움을 달래며 이른 잠자리에 들어야 했답니다.
▲사진12 - 남해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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