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개발로 예전 '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도로명에는 그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이런 도로명에는 고유한 역사와 특성을 고려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대단한 상상력의 원천입니다.
'서울 4대문 안 길 여행 프로젝트'에서는 서울 4대문 내에 어느 곳보다 과거 사람들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는 '길'을 찾아보고, 그 길과 연관된 재미있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오늘 첫 번째 행선지가 될 곳은 어디가 될지, 그리고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질까요? 그럼 슬슬 여행을 떠나 볼까요?
이 거리를 아세요?
젊음의 상징인 대학로의 맛집거리로 유명한,
사람으로 가득찬 곳...
바로대명거리를요
이 대명거리엔 참 많은 사람들이 다닙니다. 학교 가는 대학생들, 점심 먹으러 오는 직장인들, 연극 보러 오는 회사원들. 마로니에 공원에는 통기타나 엠프를 들고 나온 거리의 악사들이, 대학로의 뒷편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낙산성곽에는 운동하시는 아주머니들이. 각자 저마다의 모습으로, 저마다의 일을 하며 이 거리를 오갑니다.
현재에는 이처럼 예술과 젊음이 넘치는 활기찬 길이지만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 거리를 누가 걸어다니고, 어떤 사람이 쉬어갔을까요?
의외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대명거리 입구있는 비문을 통해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거리는 대학로에 연계된 젊음과 낭만이 살아 숨 쉬는 거리로서 조선조 시대에는 성균관 유생이 풍류와 여가를 즐겼던 유서깊은 거리이며, '반촌(泮村)길'이라고 하였다. 2000년 이 거리를 대명거리라고 명명하고 성균관길과 함께 역사문화탐방로로 지정하여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지는 거리로 조성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반촌길'은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과 '뿌리깊은 나무'의 배경이 되면서 이제 성균관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낯익은 지명이 되었죠. '반촌'이라는 지명 역시 성균관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요.
성균관에는 '반궁'이라는 별칭이 있었는데요. 그 별칭에 근거해 성균관 주변 노비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가르켜 '반촌',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을 반민 또는 반인(泮人)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임금도 말에서 내려, 가마에서조차도 내려 걸어들어가야만 하는 성균관. 그리고 거기를 나란히 걷는 유생 약용과 반인 마작대. 아무리 성균관과 가까운 반촌이라 할지라도, 유생들이 반인과 어울리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유생과 노비가 '나란히' 걷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또한 대성전과 문묘같은 신성한 영역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치외법권지역이었고,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는 것, 그리고 유생들에게 바칠 고기를 잡기 위해 칼과 같은 도구들이 많은 곳이었기에 의외로 살인사건과 같은 사건들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고 합니다.
자, 그럼 여기서 반촌을 발생한 살인 사건과 이 곳에 있었을 정약용과 마작대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때는 조선 정조 10년, 정약용과 마작대는 나란히 반촌의 길을 걸었다. 약용은 성균관 유생이었고 작대는 성균관 반인이었다.
성균관에는 대성전과 문묘와 같이 신성한 곳들이 있어 성균관 뿐만 아니라 그 주변지역인 반촌도 포교가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보니 이곳에서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푸줏간이 많아 칼과 같은 예기들이 흔하여 범죄가 발생했다 하면 끔찍한 살인사건 일색이었다
며칠전에도 있었던 살인사건.
어느 반인이 목숨을 잃었고, 그 반인은 약용의 서학 스터디 모임에 장소를 제공하던 자였다고 합니다. 우연히 들렀다 사건을 목격한 약용에게 죽은 반인의 딸이 울며 약용에게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녀가 평소에도 자태가 곱고, 말에 기품에 있어 눈여겨 보던 약용은 그만, 그녀의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말하고 맙니다. 홀리듯 말해버려 아차 싶었던 약용은 자신의 오지랖을 탓해봅니다. 약용은 전형적인 두뇌형 인간이라, 신체는 약골이요 호기심은 많아 반촌의 이일, 저일에 참견하고 다녔습니다. 다만 그 호기심과 오지랖의 발동으로 늘 반촌의 대소사에 말려들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녀에게 '내가 풀어주겠노라'고 선언해버렸네요. 명색이 성균관 유생, 말은 지켜야 하지만 어떻게 지켜야 할까, 후회만 앞섭니다.
이런 저런 책을 읽던 약용은 실학에도 관심이 있어 '증수무원록'을 바탕으로 꼼꼼히 검시를 합니다.
상처의 상태, 상처 부위의 깨끗함 등으로 미루어 봤을 때 사인은 틀림없이 칼이요, 그중에서도 칼이 깊이 먹은 것으로 보아서는 쌍수도로 베어진 것이요, 정면으로 벤것으로는 칼을 잘 부리는 자가 틀림없는데. 약용은 또다시 그의 오지랖 넘치는 입을 원망하고 맙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인은 분명 전문 칼잡이인게지요. 약골 두뇌형 인간인 약용은 혼자서는 그를 잡지 못한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새벽이 밝아올 때 쯤, 그는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수업이 끝난 약용은 성균관을 나와 반촌으로 향했고, 어느 집 담장에 몸을 기댔습니다. 담장 너머로는 작대가 윗몸을 드러낸 채 운동 삼아 큰 칼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지요. "어이, 작대 있나? "
조심스럽게 부른 약용의 목소리에,
'어! 너, 너 이자식!" 담장너머의 약용을 발견한 작대는 순식간에 담장을 뛰어넘습니다.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작대 탓에 약용은 달아나기 시작했지만, 공부만 한 유생이 작대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당연하게 작대에게 잡힌 약용은 멱살이 붙잡혔습니다. "네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성균관에서야 내가 네 놈을 어찌하지 못한다만 여기서는 뼈만 남기고 살을 다 발라줄 수 있다."
멱살을 붙잡힌 채 약용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이, 이것 보게 내가 좀 심했던 건 인정하네만 어쨌든 그 일을 마무리 지어준 것도 내가 아닌가?”
얼마 전 반촌 밖에서 술을 마시다가 사람을 패고 도망쳐온 작대가 성균관으로 숨어들어온 일이 있었는데 그날은 이례적으로 형조의 포교들이 성균관까지 쫓아서 들어왔다고 합니다. 성균관의 누구도 호조의 사람들에게 간섭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은 유생들이 반인들을 숨겨주는 것이 통례였으나, 포교들은 약용에게 찾아와 작대가 있는 곳을 물었습니다. 작대는 약용이 머무는 서재를 봐주던 노비였기 때문이지요. 포교들의 기세로 볼 때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 방까지 수색당할 판이었는데 방에 숨겨둔 금서가 발각되어 말썽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약용은 작대가 있는 곳을 고발했던 것입니다. 작대는 잡혀가서 큰 고초를 치렀고, 내심 미안했던 약용은 상소를 넣어 더 큰 처벌은 피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작대는 약용의 말에 조금 화가 풀린 듯 물었습니다.
“제길, 그게 병 주고 약 준거지.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쇼?”
“실은 내가 얼마 전에 반촌에서 살해당한 이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려 하네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오?”
“죽은 사람이 반인인데? 아주 억울하게 죽었지. 에휴, 불쌍해라.”
약용은 작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안심했습니다. 반인들은 신분이 천하다고 멸시를 받는 입장이다 보니 같은 반인끼리는 동료의식이 강하고 의리에 죽고 살았고, 약용은 그것을 알고 이용했던 것입니다. 작대는 결국 약용을 돕겠노라 약속했습니다. 죽은 자의 아내를 만나본 약용은 그녀의 외모가 매우 고와서 놀랐습니다. 과연 그 엄마에 그 딸이었던 것이죠. 그는 그녀가 성균관에 다모 일을 보고 있다는 것을 듣고 감이 왔습니다. 기숙사에는 다모가 있었는데, 관비 중에서 예쁜 여자를 골라 고운 옷을 입혀 유생들을 시중들게 했고 가끔은 유생들이 다모를 총애하다 못해 남편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약용은 그녀가 시중을 드는 유생들을 은밀히 조사했습니다. 조사결과 그녀가 시중을 드는 유생은 총 세 명으로 밝혀졌다. 약용은 이 중 한 유생을 자세히 살피더니 이 사건의 범인임을 확신하는데...
어떠셨나요?
정약용과 마작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보는 성균관과 대명거리의 지금은. 장원 급제를 9번 한 율곡 이이도 이 곳에 있었고, 퇴계 이황도 이 곳에 있었습니다. 성균관대학교로 올라가는 정문에서 바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성균관.
지금은 개방되어있는 이 명륜당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공부를 했고, 시험을 쳤고, 밥을 먹었고, 어울려 놀기도 했었습니다. 명륜당 현판, 그리고 명륜당 천장을 가득 메운 글들은 모두 과거의 소중한 유산이죠.
명륜당과 600년된 은행나무는 꿋꿋이 예전부터 이 땅을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공자에게, 그리고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던 대성전과 그 앞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합니다.
성균관은 한켠에 꽃들에게 자리를 내어줬고, 돌담가에 핀 꽃들이 성균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 9월의 가을. 유생들이 지나다니던 이 길을 한번쯤 들러 구석구석 살펴보시지 않겠어요?
도서관도, 활쏘기 기구를 넣어놓던 육일각도 굳게 닫혀있지만. 유생들이 밥을 먹고 출석부를 적던 진사식당도 비록, 닫혀있지만. 그때를 되새기며 서울의 중심에 있던, 아무렇지 않게 스쳐지나가던 이 곳에 들러보면 어떨까요?
이 거리를 지나치며, 이 거리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바쁘게 지나쳐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