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연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과 연극이 잇따라 개막하고 있는 데요. 창의적인 소재와 재미, 검증된 인기, 그리고 높은 완성도를 갖춘 웹툰의 2차 콘텐츠 진출은 드라마와 영화로 이미 확인됐습니다. 이 흐름이 공연에서도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제작 시리즈 도합 2,600만 관객 신화를 이룬 작품 ‘신과 함께’, 직장인의 삶과 애환을 다루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던 드라마 ‘미생’, 사랑스러운 남녀 콤비가 그리는 퇴사 밀당 로맨스 ‘김비서가 왜 그럴까’, 골칫거리 마트에서 펼쳐지는 유쾌한 이야기 ‘쌉니다 천리마마트’. 어디서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제목만 들어도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 작품들에는 특별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인터넷 만화,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라는 사실입니다.
독특한 소재, 뛰어난 창의력과 돋보이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웹툰은 요즘 문화 콘텐츠 시장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터넷 기술 발달로 실시간 정보 공유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여기에 알맞은 콘텐츠가 조금씩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웹툰도 이런 콘텐츠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구나 간단한 손가락 터치와 스크롤링만으로 커다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웹툰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는데요. 스마트 기기 대중화로 확산된 ‘스낵컬처(Snack Culture)’가 속도감을 중시하고 번거로움을 꺼리는 요즘 트렌드와 잘 맞아떨어지며 나타난 결과입니다. 이후 든든한 조력자로 포털사이트가 함께하며 날개를 달고, 기존 출판 만화가 가진 단점을 극복하며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끌었습니다. 수익성을 보장받고, 더 많은 창작 기회를 얻으며 존재감을 확실히 했습니다.
웹툰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다른 장르와 결합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해외로 수출하며 새로운 수익 창출 모델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속 가능성과 성공 가능성을 어느 정도 보장하며 시장에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미 형성된 팬들도 자신이 아끼는 원작의 재탄생에 보내는 기대가 큽니다. 이들은 원작이 뮤지컬과 연극, 드라마, 영화 등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현실화할지, 또 자신이 아끼는 캐릭터를 누가 연기할지 궁금해하면서 계속 관심 갖고 지켜보고 있는데요. 때로는 2차 콘텐츠로 탄생한 작품을 먼저 보고 원작을 찾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렇게 창작물 하나를 다양한 부가 창작물로 만들어내는 형식을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 OSMU)’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재탄생된 문화 콘텐츠는 작품에 대한 소비자 관심도를 높이며, 긍정적인 이중효과를 갖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웹툰으로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한다는 데 대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흥행에 실패하면 막대한 제작 비용을 회수하기 어려운 데다 이로부터 얻게 되는 손해도 만만치 않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웹툰을 원작으로 제작된 콘텐츠들은 이런 기우를 뒤로 한 채 원작이 보유한 인기를 등에 업고 힘차게 성공 가도를 달리며,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연극과 뮤지컬로 제작돼 무대까지 진출했습니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와 ‘쌉니다 천리마마트’ 같은 웹툰은 2차 콘텐츠인 드라마로 가공할 때, 각색을 최소화하고 원작 느낌을 그대로 살려 인기를 얻었습니다. 반면 ‘신과 함께’는 웹툰에서 느낄 수 없는 다양한 변화를 통해 긴장감과 재미를 주며 수천만 관객을 끌어 모았는데요. 이번에 연극과 뮤지컬로 변신한 웹툰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관객들로부터 아낌없는 칭찬 세례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두 작품을 직접 만나봤습니다.
■ ‘숨 쉬는 방법’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지난 10월 무대에 오른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는 2017년 7월부터 2019년 3월까지 연재된 까마중 작가의 동명 인기 웹툰에 기반해 탄생한 작품입니다. 평균 평점 9.97점에 빛나는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가 연극으로 제작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원작 팬들의 기대감도 상당했는데요. 박경찬 연출은 “제작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꼈다”며 “원작이 가진 공감과 위로,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그대로 가져가면서, 추상 공간인 주인공 찬란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무대로 옮기는 데 중점을 뒀다”고 밝혔습니다. 실제 연극은 배우들의 외적 이미지까지 거의 똑같이 할 만큼 원작에 매우 가깝게 만들며, 원작을 아끼는 독자들을 배려했습니다.
하지만 연극이라는 특성을 고려한 작은 변화는 불가피했습니다. 우선 극적인 재미와 감동을 더하고자 인물 성격을 더 강하게 부각시켰습니다. 또 다양한 장치를 활용해 찬란의 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에피소드를 추가했습니다. 이렇게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는 2년이 넘는 개발 기간을 거치며, 원작의 흐름을 균형 있게 유지하면서도 연극 장르에 어울리는 살아 숨 쉬는 감성을 입혔습니다. 덕분에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며, 원작이 전하고자 했던 따뜻한 위로를 담아 관객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23살 대학생 찬란은 매일 아르바이트에 허덕이며 삽니다. 삶의 무게를 온통 짊어진 듯한 찬란에게 여유는 사치일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도래 때문에 찬란은 폐부를 앞둔 연극부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연극부원들과 다양한 에피소드를 겪으며 마지막 연극을 함께합니다. 이들은 서로를 응원하고 다독이며, 찬란한 청춘의 순간을 함께 나눕니다. 우리 모두의 오늘은 청춘과 같습니다. 청춘은 늘 아름답고 싱그럽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 청춘들은 즐길 새가 없죠. 청춘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거나 당장 급한 일로 현재를 즐길 수 없는 까닭입니다. 연극은 이렇게 평범한 청춘들의 하루하루가 눈부시게 빛나며, 무엇보다 아름답고 찬란하다고 말합니다.
이 연극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숨 쉬는 방법’을 잊고 살아가는 찬란에게 그 방법을 찾게 해 주고 싶었다는 도래의 말도 깊은 울림으로 남는데요. 가을 한복판에서 만난 따뜻한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는 언제나 변함없이 반짝이고 있는 모두의 일상을 응원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용기를 전할 것입니다.
■ 잊고 지냈던 소중한 사랑을 다시 한 번
지난 9월에 개막한 뮤지컬 ‘원모어(One More)’는 같은 날이 반복되는 ‘타임 루프 로맨스’라는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소재를 다룹니다. 시간 여행은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 같은 다양한 장르에서 이미 많이 다뤄진 이야기인데요. 하지만 이 뮤지컬은 이를 식상하게 느끼지 않도록 새롭고 신선하게 풀어냈습니다.
뮤지컬 ‘원모어’의 원작 웹툰 ‘헤어진 다음 날(남지은· 김인호 작가)’은 지난 2016년 국내 웹 드라마 ‘원모어타임(One More Time)’으로 먼저 제작돼 일본과 중국에 방영됐습니다. 현재는 넷플릭스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 만날 수 있는 화제작입니다. ‘원모어’는 웹툰 장면 일부를 활용해 무대 배경도 아기자기하게 구성했는데요. 마치 웹툰에서 튀어나온 듯한 무대 구성과 등장인물로 원작의 배경과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극적인 각색을 더하며 많은 변화를 줬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공의 이름 변화입니다. 원작의 무명가수 유탁은 인디 밴드 리더 유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설정도 달라졌습니다. 반복되는 하루를 경험한 적이 있으며, 보컬 선생님 다인과는 연인인 듯 친구인 모호한 관계로 그려집니다. 다툼의 계기도 원작에서는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벌어진 실수와 오해 때문이지만 뮤지컬에서는 꿈을 이루기 위해 주인공이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바꿨습니다. 음악과 연기, 강렬한 스토리로 구성되는 뮤지컬을 감안한다면 매우 자연스러운 변화인데요. 이처럼 관계성에 변화를 주고, 갈등의 원인을 바꿔 불필요한 곁가지를 정리했습니다. 덕분에 뮤지컬은 유탄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다인에 대한 절실함을 확실하게 부각시켰습니다.
반복되는 괴로운 하루에서 벗어나 가장 소중한 것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유탄의 모습은 바쁘다는 핑계로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사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수많은 오늘을 거쳐 비로소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된 주인공. 그가 자신의 삶이자 영혼과도 같은 음악을 다시 행복하게 노래할 때, 관객들은 안도감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뮤지컬 ‘원모어’는 마법과도 같은 간접 경험을 통해 모든 순간과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는 당부의 메시지를 전하고, 또 현재를 돌아볼 계기를 마련합니다.
■ 웹툰의 변신은 계속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주관 ‘2019년 만화 연계 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선정작이기도 한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와 ‘원모어’는 각각 연극과 뮤지컬이라는 2차 콘텐츠로 재탄생하면서 원작과는 또 다른 매력과 재미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웹툰에서 부여받은 생명력은 작품이 가진 매력을 배가시키며 살아있는 감동을 선사했는데요. 실제로 현장에서 느껴지는 관객들 반응도 매우 긍정적입니다.
물론 우려와 희망이 교차하는 시선도 존재합니다. 웹툰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창작의 기회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또 원작이 추구하는 메시지를 훼손시키거나 잘못해 서로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기 웹툰으로 2차 콘텐츠를 만든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탄탄한 내공을 가진 원작이라면 다양하게 변하는 장르 변신이나 재가공 과정에서 거치는 각색과 윤색 작업에도 본연의 색을 잃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 탄생한 2차 콘텐츠는 뚜렷한 색을 띠며, 새로운 창작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같은 공존의 결실은 앞으로 유사한 흐름을 타고 등장할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어집니다.
앞으로도 웹툰의 OSMU 행보는 계속될 것입니다. 문화 저변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이 같은 흐름에 응원을 보냅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2차 콘텐츠가 독자 경쟁력을 갖춘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으며, 원작과 함께 꾸준하게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글 최윤영 공연칼럼니스트
이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 정기간행물 "N콘텐츠 14호"에 게재된 글을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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