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네이버 검색 결과나 제 책이 팔리는 서점에 '베스트셀러' 딱지가 붙어있다는 것, 그리고 매달 수백, 수천 종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 서점의 매대 한쪽에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 정도일 것입니다.
초판 3천 부가 다 나가면 선방, 5천 부 팔리면 베스트셀러라는 대한민국 출판계에서, 3만 부 판매가 지니는 의미는 엄청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글쎄, 정작 저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와 닿지 않습니다. 겸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진짜로 그다지 와 닿지 않습니다. 심지어 인세라는 이름으로 꽤 큰 액수가 통장에 찍혀도 그저 아, 이번 달도 감사합니다, 하고 석 달 치 월급을 한꺼번에 몰아받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석 달 치라고 한 이유는, 인세의 정산이 3개월마다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베스트셀러’라는 라벨 때문에 나의 마음 한쪽에는 늘 기쁨보다는 부채감이 존재합니다.
저의 책 <썅년의 미학>은 ‘여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으로 쓰고 그린 저의 첫 만화 에세이 단행본입니다. 여성이 여성 이야기를 한다는 것만으로 페미니즘이지만, 혹은 페미니즘이기에 저는 마케팅을 할 당시에 담당 부서에 나의 책이 ‘페미니즘’ 코너가 아닌 ‘에세이’코너에 놓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좀 더 쉽게 페미니즘을 접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 속에는 제가 겪은 일도 있고 제 주위의 여성이 겪은 일도 있고, 혹은 우리 모두 겪었으나 그동안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최근 발매된 해당 책의 2권 격인 <썅년의 미학 플러스>의 에필로그에도 썼지만 저는 첫 책이 발매된 지 1년이 넘는 시점에도 서점의 벽장 자리가 아닌 매대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작가로서는 너무도 기쁘지만, 여성으로서는 아직도 이 책이 세상에 필요하다는 사실에 부아가 치밀다가 끝내는 슬퍼지는 경험을 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책이 나오고 1년쯤 지나면 제 책은 다시는 필요 없게 되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즈음 되면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이 너무도 당연해서 제가 쓴 이야기는 그저 고루한 이야기 취급을 받기를 바란다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 진심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세상은 변하고 있지만, 저의 책을 읽고 바뀌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 그 길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제가 여성의 이야기를 ‘팔아’ ‘돈벌이’로 이용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라는 의견까지 접하고 나니 ‘혹시 정말 내가 뭔가 단단히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아보면 저와는 다른, 그러니까 남자 작가들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성 서사가 아니어도 그들은 얼마든지 미소녀 그림을, 미소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썼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자인 저는 여성의 이야기를 쓰면 안 되는걸까요? 모든 창작물이 그렇듯 제 작품 역시 허구와 사실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수많은 창작물 중 하나일 뿐인데 말입니다.
여성 창작자, 아니 여성의 진정성은 왜 늘 의심받을까요? 여성에게만 그 부채감을 느끼라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지 않은가요? 물론, 늘 겸손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을 할 것입니다. 저는 여타 다른 작가들, 특히 여성 작가들과는 달리 작가라는 저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에 대해 큰 부담이 없는 편입니다. 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즐기기도 하고 또 자신을 그럴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베스트셀러 작가라서가 아니라 작가라는 직업과 저의 작업물이 저를 표현하는 한 수단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으로부터는 저의 그런 태도가 속된 말로 나댄다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제가 굳이 여성 작가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남성 작가와 비교하여 여성 작가는 좀처럼 ‘나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현재, 미디어에 등장하는 여성 만화가를 단 한 명만 떠올려 볼까요? 아마 매우, 매우 떠올리기 힘들 것입니다. 다른 장르로 옮겨가야 간신히 에세이 분야에서 활동 중인 곽정은 작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 작가는 굳이 다른 장르로 옮겨갈 필요도 없이, 얼마 전에 유명 프랜차이즈 음식점의 CF를 촬영한 주호민, 이말년 작가라든가, 대형 방송사의 황금 시간대 예능에 고정 출연 중인 기안84 작가가 있지 않던가요. 왜일까요? 여성 작가들이, 남자 작가들만큼 소위 말하는 ‘끼’가 없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 주위만 해도 끼도 재능도 열정도 넘치는 여성 작가가 한가득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남성 작가만큼 미디어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 사회가 여성 작가 essay 혹은 여성에게만 들이대지는 잣대가 유난히 가혹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은 너무도 쉽게 재단당합니다. 인스타그램에 겨우 댓글 하나 친절하게 달지 않았다고 눈물의 사과를 해야 했던 여자 배우라든가, 평소에 화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필 사과문을 올려야 했던 여자 아이돌이라든가, 자신이 선택하여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먹어야 했던 여자 연예인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주 조금만 실수를 해도 혹은 실수조차 하지 않아도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어느 누가, 어떤 여성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베스트셀러라는 스티커 역시 저에게 있어서는 상처 같은 것입니다. 너무도 커다래서 모두가 볼 수 있고 평생 흉터로 남아 안고 가야만 하는 상처. 과거의 저라면 그 흉터를 가리는 것에 급급했을 것입니다. 운이 좋았죠, 다른 사람 덕분이죠, 라고 말하며 나를 감추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이제는 아무리 스스로 베스트셀러라는 사실에 대해 실감이 나지 않더라도 누군가 그것에 대해 언급하거나 칭찬의 말을 하면 이제는 더 ‘빼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죠? 대단하죠? 저 멋있죠, 잘났죠? 못하는 게 대체 뭐야~!” 하면서 더 너스레를 떱니다.
일부러 더 나대고, 더 자랑스러워합니다.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이, 겸손하지 않고, 나서고, 나의 입지를 확실히 하는 것이 앞으로 만화가를 포함한 모든 여성 창작자들에게도 길을 열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저는 좀 더 자랑할 생각입니다. 있는 힘껏 나댈 생각입니다. 제 책의 주제처럼 어차피 여성인 제가 내 마음대로 했을 때 “썅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차라리 자신을 “썅년!”이라고 칭하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습니다.
분명 언젠가는 제 만화가, 글이 정말로 ‘낡은’ 취급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수십만 부가 팔렸던 <아프니까 청춘이다> 역시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냐” 소리를 듣지 않던가요. 하지만 그 메시지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고 그래서 책이 되었고 또 팔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말을 믿습니다. 저의 책 역시 그렇다고 믿습니다. 저의 책은, 글은, 만화는, 지금 필요합니다. 지금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여성인 나의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저는 앞으로도 꾸준히 쓰고 그릴 것입니다.
글 민서영 <썅년의 미학>을 쓰고 그린 작가입니다.
이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정기 간행물 <지금, 만화 VOL.12>에 게재된 글을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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