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고 있습니다. 최근 온라인 기반의 음성 방송 콘텐츠, 이른바 오디오 콘텐츠(Audio contents)가 인기인데요.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을 넘어서 오디오 드라마, 오디오 예능으로까지 영역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런 열풍을 이끄는 것일까요?
' 지금까지 이런 퀴즈쇼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퀴즈쇼인가 아니면 거저먹기인가.
찬물 샤워보다 더 쉬운 퀴즈 쇼! 극한 퀴즈 쇼! '
“짜자 자잔.” 오프닝 송과 함께 권혁수의, 영화 ‘극한 직업’을 패러디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권혁수 특유의 성대모사가 곁들여진 이 퀴즈쇼는 거두절미하고 퀴즈로 들어가는데, 그 소재가 가진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들이 소개가 됩니다. 그러다 갑자기 제시되는 퀴즈. 이게 끝입니다. 3분이 채 되지 않는 이 오디오 클립은 매주 네 차례 업로드되며, 적게는 200건에서 많게는 500건에 달하는 조회 수를 기록합니다. 적어 보이지만 누적된 조회 수는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부담이 없고 퀴즈도 재밌는데, 정답을 맞히면 커피 쿠폰도 줍니다. 매일 참여하면 개근상을 뽑아 문화상품권을 제공합니다.
목소리로만 진행되는 오디오 콘텐츠지만 의외로 3000명 이상의 많은 구독자가 ‘권혁수의 극한 퀴즈’ 콘텐츠를 듣고 있습니다. 이름도 심상찮은 ‘시방 상담소’ 한편 이름도 심상찮은 ‘시방 상담소’에는 유병권과 김수미가 출연해 청취자들이 보내온 사연에 대한 속 시원한 상담을 해줍니다. 시작부터 “구독해- 이 시방 새들아!”를 외치는 김수미의 캐릭터가 묻어나는 콘텐츠다. 욕이 시원시원하게 터져 나오는데, 그럴수록 반응은 폭발적입니다.
“막돼먹은 상사 욕 좀 해 주세요” 같은 요구 사항이 심심찮게 올라오고, 그 답답한 마음을 김수미의 욕 한 방이 시원하게 풀어줍니다. 단순해 보이는 사연 청취와 고민 상담이라는 오디오 콘텐츠가 김수미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만나 확실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기성 라디오 방송이라면 하기 어려운 수위일 수 있지만, 온라인이라는 특성이 이를 적절히 받아주는 이 오디오 콘텐츠는 구독자 수가 1만 명에 이릅니다.
최근 오디오 콘텐츠가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오디오 콘텐츠는 크게 팟캐스트(Pod cast)와 오디오북(Audio Book)으로 분류돼 왔습니다. 그래서 오디오 콘텐츠는 팟캐스트의 시사방송이나 음성 기반의 읽어주는 책 정도로 인식됐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 오디오 콘텐츠가 기존 영역을 넘어 드라마나 예능과 같이 다양한 분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네이버의 자체 플랫폼인 ‘오디오 클립’은 한 마디로 오디오 콘텐츠의 포털 사이트 같은 공간입니다. 이곳에는 시사와 교양, 교육은 물론이고, 뉴스와 예능, 드라마 같은 오디오 콘텐츠들이 포진해 사용자들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디오 클립의 오디오 드라마를 보면 온라인 시대에서 라디오 드라마의 부활을 기대케 합니다. SBS에서 방영되고 있는 ‘수상한 장모’나 ‘의사 요한’, ‘닥터 탐정’ 같은 드라마들이 오디오 버전으로 그대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욕망하다’ 같은 웹툰도 오디오 드라마로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괴담을 담은 ‘채티 오디오 드라마’는 구독자 1만 1000명을 넘어서며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한여름 더위를 날려줄 심장 쫄깃쫄깃 반전 이야기’라는 구호는 ‘채티 오디오 드라마’가 왜 인기 있는지 가늠케 합니다. 공포 소재는 영상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오디오로 듣는 것이 훨씬 더 무서운 상상을 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최근 김수미나 권혁수, ‘하트 브레이크 마켓’의 하하 별 등 연예인이 참여하는 오디오 콘텐츠가 늘고 있습니다. 오디오가 가진 잠재력 때문입니다. 또 연예인은 아니지만 한의학 정보를 전하는 ‘이재성 박사의 식탁 보감’이나 범죄심리학자인 이수정과 ‘씨네 21’ 기자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같은 콘텐츠도 인기입니다.
■ ‘Video Failed to kill The Radio Star’
버글스가 1979년에 발표한 ‘Video Killed The Radio Star’는 마치 라디오 시대의 종언을 예고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1981년 MTV 개국과 함께 들려온 이 노래는 라디오로 대변되는 청각 시대가 TV가 중심인 시각 시대로 바뀔 것이라는 예언처럼 불렸습니다. 게다가 199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라디오가 곧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망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1995년 인터넷을 이용한 실시간 라디오 방송이 실현되면서, 라디오가 인터넷과 결합하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MBC 라디오 mini, KBS 라디오 kong, SBS 고릴라 같은 앱을 이용하면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으로 라디오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실시간 쌍방향 소통은 물론이고, 동영상 서비스가 연결된 ‘보이는 라디오’까지 즐길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시각 정보가 급증하고 볼거리가 많아지면서 오히려 청각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3D에 이어 4D까지 나갔던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진화가 청각 체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돌비 애트모스(DOLBY ATMOS) 같은 입체 서라운드 음향을 도입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또 최근 인기 있는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콘텐츠 역시 시각의 홍수 속에 청각의 평온을 찾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투 머치 스펙터클’의 시대가 가져온 청각의 역전 승리입니다.
무엇보다 오디오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습니다. 음성인식 기반의 인공지능(AI) 스피커입니다. AI 기술은 아직 로봇과 연결되는 식으로 본격화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관문으로서 ‘음성인식’이라는 신세계를 열었습니다. 집집마다 놓인 음성인식 스피커는 날씨를 알려주고, 취향에 맞는 음악을 들려주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디오는 우리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라디오 시절의 오디오는 라디오라는 특정 매체를 통해서만 전해졌는데요. 인터넷과 결합한 오디오는 이제 웹과 모바일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I 스피커와 연결되면서 이제는 일상 속으로까지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최근 자동차에 보편화되고 있는 커넥티드 카 기술도 오디오 콘텐츠의 활용도를 높입니다. 스마트 기기와 차량을 자동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스마트폰으로 즐기던 오디오 콘텐츠를 차량에서도 소비할 수 있게 돕습니다. NHN 벅스를 통해 출시된 팟캐스트 플랫폼 ‘팟티(PODTY)’는 양질의 오디오 콘텐츠를 커넥티드 카 플랫폼으로 확장해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이 팟티에서 화제가 되는 프로그램은 ‘김어준의 뉴스공장’이나 ‘컬투쇼’, ‘김현정의 뉴스쇼’처럼 기존 라디오 콘텐츠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팟캐스트 기반의 ‘화요 지식 살롱’ 같은 콘텐츠도 다수 포진돼 있습니다. 실시간으로만 들어야 했던 라디오 방송과 달리 콘텐츠를 원하는 시간에 선택해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최근 이용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 ‘투 머치’ 영상 시대에 재조명된 오디오의 속삭임
오디오 콘텐츠 수요가 늘고 있는 것은 우리만의 일이 아닙니다. 2018년 11월 엑티베이트(Activate) 자료에 따르면, 미국 팟캐스트 청취자 수가 2018년 월간 7300만 명에서 2022년에는 월간 1억 320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날 전망입니다. 구글은 이미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45개국에서 성우가 낭독하는 오디오북 콘텐츠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듣는 책’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가진 움직임입니다. 이 콘텐츠는 구글의 AI 스피커 구글 홈(Google Home)과 AI 플랫폼 구글 어시스턴트(Google Assistant)가 탑재된 기기에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에 맞서 아마존도 오디오 콘텐츠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출판사와 낭독자를 연결하는 플랫폼 ‘아마존 오더블(Amazon Audible)’로 제작비를 기존 대비 30~40% 수준으로 낮췄습니다. 또 온라인 코미디 콘텐츠 서비스 업체인 루프탑 미디어(Rooftop Media)를 인수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AI 스피커 시장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의 이면에 존재하는 업체들의 속내입니다. AI 스피커는 단순히 오디오의 문제가 아니고, 새로운 정보 창구에 대한 헤게모니 전쟁이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인터넷이 정보를 검색하는 제1창구 역할을 해왔는데요. 그래서 네이버나 다음 같은 포털들이 그 관문을 장악해 이용자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AI 스피커를 중심으로 오디오를 활용한 정보 검색이나 소비가 이뤄질 전망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자신들의 AI 스피커를 설치하려는 통신사와 포털, 글로벌 기업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디어 환경에서 오디오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생산할 수 있으며, 다른 일을 하면서도 소비할 수 있는 편의성이 오디오 콘텐츠가 가진 가장 큰 힘인 것이죠. 오디오 콘텐츠는 1 대 1 서비스를 원하는 소비자들에게 최적화됐다는 장점도 갖고 있습니다. 라디오 방송의 힘이 TV보다 강할 수 있는 것은 귀에 대고 직접 전해지는 청각의 힘이 1 대 1 소통의 느낌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괴벨스가 대중을 선전선동하기 위해 다른 매체가 아닌 라디오를 가장 중요시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에 담긴 영상이 오디오를 밀어낼 것이라는 한때의 예측은 점점 현실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오디오는 인터넷과 모바일, AI 기술을 만나며 점점 진화했습니다. 그리고 그 편의성과 막강한 영향력으로 우리의 귓속에 내밀한 정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영상 콘텐츠 속에서 오디오는 마치 ‘나만의 정보’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갈수록 인기를 끌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투 머치’ 영상 시대에 눈을 감고 누군가의 속삭임을 더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오디오 콘텐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새삼 실감할 듯싶습니다.
글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gmail.com
이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 정기간행물 "N콘텐츠 13호"에 게재된 글을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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