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정서 차이로 장벽이 높았던 영미권 드라마가 최근 국내에서 리메이크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드라마 ‘지정생존자’ 리메이크 성공이 한국드라마의 미래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지난 여름 tvN에서 방영된 ‘60일, 지정생존자’는 국내에서 미국드라마를 리메이크한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2016년 tvN ‘굿와이프’가 국내 최초의 리메이크 기록을 세운 이후부터 올해까지, 미국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사례는 두 드라마 외에 tvN ‘안투라지’, ‘크리미널마인드’, KBS ‘슈츠’, TV조선 ‘레버리지: 사기조작단’ 등 네 편이나 더 있습니다. 2002년 SBS ‘별을 쏘다’로 시작된 국내의 외국드라마 리메이크 역사에서 13년 동안 단 한 편도 시도하지 않았던 미국드라마 리메이크작이 최근 3년 사이 부쩍 늘어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 외국드라마 리메이크 트렌드 변화 '
이 정도면 하나의 트렌드라 할만합니다. 네 편이나 리메이크작을 내놓은 tvN이 트렌드를 주도한 가운데,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이 미국드라마 리메이크 열풍에 가세했습니다. 범위를 더 넓혀 영국드라마 리메이크 사례까지 살펴보면 이 같은 변화가 더 잘 감지됩니다. 지난해 동명의 영국드라마를 각색한 ‘미스트리스’와 ‘라이프 온 마스’가 각각 OCN과 tvN에서 방영됐습니다. 올해 초에는 MBC가 영국드라마 ‘루터’를 각색한 ‘나쁜 형사’를 선보였습니다.
그동안 일본과 대만 등 아시아 작품 위주였던 외국드라마 리메이크 트렌드가 최근 들어 영미권 작품 리메이크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이어서 현지화에 더 유리했던 일본과 대만 작품과 달리, 영미권 드라마는 문화나 정서 차이로 리메이크의 장벽이 높았던 게 사실입니다. 이러한 과거를 지나 최근 활발한 영미권 드라마 리메이크는 자연스럽게 한국드라마의 성장을 보여줍니다. 세계에서 대중문화 시장을 선도하는 미국과 영국은 특히 장르물의 본고장으로 불립니다. 두 나라는 미스터리와 추리, 범죄수사물, 법정물, 메디컬 드라마 등 가장 인기 있는 장르물의 글로벌 포맷을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기존의 일본과 대만 드라마 리메이크 작품은 로맨스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반면 영미드라마의 다채로운 장르물 리메이크는 한국드라마의 다양성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굿와이프’, ‘슈츠’는 법정물, ‘크리미널마인드’, ‘라이프 온 마스’, ‘나쁜 형사’는 수사물, ‘미스트리스’는 미스터리 범죄물, ‘레버리지: 사기조작단’은 케이퍼물입니다. 몇 년 사이 국내에서 영미권 장르물에 영향을 받은 ‘한국형 장르드라마’들이 꾸준하게 성장해왔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제 그 본고장의 정통 장르물 리메이크 유행은 한국드라마가 글로벌 포맷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
이 시기가 마침 미국 방송 시장에 한국드라마들의 포맷 수출을 하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린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비록 제작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리메이크 계약을 성사시켰던 tvN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 SBS ‘별에서 온 그대’ 등이 포문을 열었습니다. 이어서 2017년 SBS ‘신의 선물-14일’을 리메이크한 작품이 파일럿 제작 없이 정규 시즌 편성을 받아 미국 지상파 채널에서 방영됐습니다. 같은 해 제작된 KBS ‘굿닥터’ 의 동명 리메이크작은 현재까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올해 최고의 화제작인 JTBC ‘스카이캐슬’이 미국 지상파 NBC에서 파일럿 오더를 받았습니다. 동아시아 중심으로 한류 열풍이 일었던 한국드라마의 위상이 특정 지역을 넘어 세계에서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영미권드라마 리메이크작은 다른 외국드라마 리메이크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공확률이 높은 편입니다. ‘굿와이프’의 호평 이후 ‘안투라지’와 ‘크리미널마인드’가 연이어 저조한 관심과 완성도 논란에 시달리면서 리메이크 열풍이 가라앉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2018년 방영된 ‘라이프 온 마스’가 시청률과 비평 양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양상이 다시 바뀌었습니다.
‘굿와이프’의 이정효 감독이 연출을 맡은 ‘라이프 온 마스’ 는 원작의 타임슬립 수사물 형식을 1980년대의 한국 상황에 자연스럽게 이식시켜 흥미로운 복고 수사물로 재탄생했습니다. ‘미스트리스’는 시청률에서는 저조한 기록을 남겼으나, 완성도는 웰메이드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 작품입니다. 선정적인 소재에 가려진, 여성들의 연대는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정신을 잘 반영했고, 영화감독 출신의 한지승과 송일곤 감독이 선보인 품격 있는 영상미도 화제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슈츠’와 ‘나쁜 형사’는 범작이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에서 선전하며 장르물에 인색했던 지상파 드라마의 다양성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60일, 지정생존자의 성공 요인 '
‘60일, 지정생존자’는 한층 더 진화한 미국드라마 리메이크 사례를 남겼습니다. 2016년부터 올해까지 미국 ABC와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지정생존자’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방영 전부터 기대보다는 우려가 더 컸던 드라마 입니다. 정치 스릴러라는 장르가 국내에선 낯선 장르인 데다, 양국의 정치 제도에도 차이가 컸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의 핵심 소재인 ‘지정생존자 제도’가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 제도는 대통령과 그 승계자들이 모두 사망하는 비상 상황이 생길 경우, 미리 지정해놓은 특정인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제도입니다.
원작에서는 연두교서 발표가 진행 중이던 국회의사당에서 대형 폭발사건이 발생해 대통령과 그 직위를 승계할 고위 관료들이 동시에 사망합니다. 이에 지정생존자였던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이 대통령직에 오르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기본 배경부터가 원작과 다른 ‘60일, 지정 생존자’는 이 제도를 대통령직 권한 대행 체제로 각색했습니다. 대통령이 연설 중이던 국회의사당에서 발생한 초유의 테러사건으로 대통령과 장관들이 모두 사망하자, 법률이 정한 의전 순서에 따라 승계서열 14위였던 환경부 장관 박무진(지진희)이 권한 대행직에 오르는 것으로 출발했습니다. 국내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유고시 두 달 안에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치러야 합니다. 이에 ‘60일간의 권한 대행직’이라는 전제가 붙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차이가 작품에 ‘신의 한수’로 작용했습니다. 원작에서는 톰 커크먼이 위기 상황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박무진의 권력에 한계가 있어 사소한 결정 하나에도 논쟁과 해석이 이어지면서 더 흥미로운 긴장감이 구축됩니다. 시즌3에 이르는 원작의 긴 이야기를 16부작으로 압축해야 하는 포맷에서도 두 달 간의 시간 제한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그가 대통령 권한 대행직을 수락한 것은 당시 비서실장 한주승(허준호)의 말 때문입니다. “대통령으로 권력을 행사하라는 게 아닙니다. 시민의 책무를 다하라는 겁니다. 권한대행 자리에 박무진 당신을 지목한 건 이 나라 헌법이니까.” 이 말대로 박무진은 내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상식’과 ‘원칙’에 의거한 정치를 펼쳐나갑니다. 박무진을 중심으로 한 청와대의 젊은 참모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속한 진영의 승리에만 관심을 쏟았던 참모진들은 박무진을 지켜보면서 ‘좋은 사람이 이기는 세상’을 위한 정치를 꿈꾸게 됩니다. 극본을 맡은 김태희 작가는 다소 이질적일 수 있는 미국산 원작의 정치 스릴러를 그의 대표작인 KBS ‘성균관 스캔들’의 청춘 성장 서사처럼 ‘내일 더 나아질 나라의 미래’에 주목하는 젊은 청와대의 성장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시청자들에게 한층 친근하게 다가갔습니다.
' 한국드라마의 내일을 위한 메시지 '
‘60일, 지정생존자’의 성공은 단순한 리메이크의 모범 사례를 넘어 한국드라마의 미래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방영 당시 가장 큰 화제를 모았던 순간은 차별금지법 에피소드 입니다. 국제 영화제 수상으로 전국민적 관심을 끈 감독의 커밍아웃으로 촉발된 극 중의 차별금지법 논쟁은 차기 대선에 출마할 예정이었던 박무진의 정치 행보에 치명타가 됩니다. 박무진은 결국 현실의 압력에 밀려 정책 입안을 유보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평등권이 아닌가”라는 그의 물음은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드라마는 마지막회에서 다음 대선을 준비하는 박무진의 참모들이 차별금지법 서명을 받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아직 끝나지 않은 화두임을 강조했습니다.
‘60일, 지정생존자’의 이 같은 문제의식은 미국드라마 리메이크의 장점이 단지 형식과 소재의 다양성뿐 아니라 진보적인 내용에도 있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원작에서도 다문화사회인 미국의 특성을 반영해, 인종과 성소수자, 계급 등 민감한 사회적 갈등을 중요한 내용으로 다룹니다. 이러한 사회적 메시지는 드라마에 깊이와 공감을 더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60일, 지정생존자’에 대한 호평 중 하나는 원작에 담긴 이러한 정신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미국드라마 리메이크의 첫 성공사례였던 한국판 ‘굿와이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작품은 원작의 성소수자와 장애인, 페미니즘 이슈를 고스란히 녹여내 충성심 높은 원작 팬들까지 사로잡았습니다.
‘굿와이프’에 이은 ‘60일, 지정생존자’의 성공 사례는 한국드라마가 재미와 형식의 완성도에만 신경 쓰던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숙한 주제의식을 갖춰야 한다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는 글로벌 시대에 콘텐츠가 갖춰야 할 필수 요소이기도 합니다. 단적인 사례로 세계 콘텐츠 시장을 좌우하고 있는 디즈니의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최근 디즈니는 과거의 흥행 콘텐츠를 리메이크하면서 혐오와 차별 같은 구시대적인 가치관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또 인종 다양성을 고려한 캐스팅을 전면에 내세우며 ‘정치적 올바름’ 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디즈니의 변화는 평등과 다양성의 메시지가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미국드라마 리메이크 성공작들은 한국드라마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를 환기합니다.
글 김선영 대중문화 평론가 herland@naver.com
이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 정기간행물 "N콘텐츠 13호"에 게재된 글을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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