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은 ‘탈 화이트워싱(Whitewashing)'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아시아계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한 지난 8월을 일컬
‘아시아의 8월(Asian August)’이란 말까지 생겼다.
한국계 배우들을 캐스팅한 <김씨네 편의점(Kim's Convenience)>의 성공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과연 한국의 드라마·영화 콘텐츠에서도
인종의 다양성을 품은 변화의 바람이 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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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유진(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아시아의 8월(Asian August)은 원작자와 콘텐츠 생산자의 확고한 의지가 만든 일종의 성과였다.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원작자 케빈 콴(Kevin Kwan)은 “주요 배역이 모두 아시아계 배우로 캐스팅된 영화가 할리우드의 정형화된 시스템에서도 성공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으며,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에게(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 원작자인 한국계 미국인 작가 제니 한(Jenny Han)은 영화화 계약 당시 “주인공은 반드시 동양계 배우가 맡아야 한다”고 못을 박기도 했다. 영화 <서치>의 아니쉬 차간티(Aneesh Chaganty)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왜 주인공을 한국계 가족으로 설정했는가?’라는 질문에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부터 한국계 배우 존 조와 함께 하고 싶었다. 존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인이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왼쪽부터)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에게>, <서치>, 소설 <파칭코>
지난 8월 TV 콘텐츠로 영역을 넓힌 애플은 드라마 <파친코>를 제작한다고 밝혔다. <파친코>는 재미동포 작가 이민진 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에서 4대에 걸쳐 사는 가족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담았다. 드라마 <파친코>는 한국을 비롯 아시아계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 될 것으로 알려졌다. 한인 이민자 가정이 서구문화권에서 창작된 콘텐츠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건 <파친코>가 처음은 아니다. 앞서 2016년 캐나다 국영방송 CBC는 토론토의 오래된 저소득층 지역인 리젠트 파크 인근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한국계 이민자 가정의 삶을 그려낸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Kim's Convenience)>을 선보였다. <김씨네 편의점>은 지난 9월 넷플릭스 코리아에서 공개되며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김씨네 편의점>은 단순히 유색인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불완전한 개인 간 갈등과 이로 인한 내적 고민을 섬세하게 그린다는 점에서 다문화주의를 지향하는 캐나다에서 성공한 ‘탈 화이트워싱’ 콘텐츠 사례로 평가받는다.
<김씨네 편의점>
<김씨네 편의점>에는 고집 센 가부장적 아빠이자 애국자인 김상일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학벌·계급 문화에 길들여진 엄마 김용미, 그리고 아들 정과 딸 자넷이 등장한다. 자칫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구성이지만, 이 가족을 이민 1세대 부모와 2세대 자식들 간의 언어·문화적 갈등의 측면에서 접근하니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김씨네 편의점>은 한국 문화를 제법 사실적으로 소개한다. 한 에피소드에서 김상일은 손님에게 한국의 태권도·합기도와 일본 무술의 차이점을 열심히 설명하고,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손님에게 ‘인삼’과 ‘진셍’(Ginseng, 인삼의 일본식 발음)의 차이를 설파하며, 한국어인 인삼으로 부를 것을 재차 강조한다. 딸 자넷은 사촌동생과 친구들과 함께 한인타운에서 순두부찌개를 먹기도 한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수용 가능한 행동이 타문화권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오해’를 보여주는 장면들도 있다. 가벼운 딱밤이 아동폭력으로, 똥침은 성추행으로 오해 받는 모습은 현지 시청자들에게는 한국의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할 기회를, 한국 시청자에겐 문화차이에 대한 간접경험을 제공한다.
드라마는 한국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김상일은 틈만 나면 손님과 딸에게 일제강점기 등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고,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그의 투철한 애국심은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일으킨다. 편의점 앞 불법주차 차량이 일본산 자동차라고 착각하고 딸에게 경찰에 신고할 것을 지시하지만, 이내 한국산 현대 자동차라는 것을 알고 황급히 말린다. 하루는 딸과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남자가 편의점으로 딸을 데리러 오자 다짜고짜 “한국의 광복절이 언제인 줄 아느냐?”고 묻기도 한다.
정과 자넷의 사촌으로 등장하는 나영도 한국인에 대한 편견이 반영된 인물로 꼽힌다. 고양이 귀 머리띠를 하고 공주풍 옷을 입은 나영의 모습은 실제 한국 여성들의 모습과 상당히 동떨어져있다. 시도 때도 없이 셀카봉을 들고 ‘브이(V)’자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거나 ‘깍두기’를 외치며 미소를 짓는 모습 역시 한국 관광객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에 가깝다.
<김씨네 편의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차별이라기 보단 다양성 발현의 일부로 읽히도록 만드는 ‘관계성’이다. 주변 인물 누구도 이들을 이방인 혹은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며, 상일 등 개별 인물들 역시 타인과의 관계에서 유연성을 보인다. 가령 김상일이 게이 고객으로부터 ‘성소수자 혐오자’라는 비난을 받자 게이를 대상으로 한 할인행사를 벌인 에피소드는 보수주의자가 ‘다른’ 문화와 공존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문화주의 사회에서 지녀야 할 포용과 어울림의 미덕을 보여준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좌) 연극 <김씨네 편의점> 한 장면 , (우) 연극 <김씨네 편의점> 최인섭
<김씨네 편의점>은 이민 1.5세인 최인섭 씨가 극본·연출·제작·연기까지 총괄한 동명의 독립연극에서 출발했다. 한 살 때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 온 최 씨는 토론토의 이토비코(Etobicoke)에서 친척이 운영하던 ‘김씨네 잡화상’이라는 편의점 건물 위층에 살았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김씨네 편의점>은 가족과 친구들의 삶, 그리고 제 삶의 조각들을 하나, 둘 모아 만든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이민자 가정의 삶에 뿌리를 두고 만들어진 연극은 2011년 토론토 연극축제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주목받았다. <김씨네 편의점>은 그해 143개 출품작 가운데 ‘베스트 프린지 10’에 뽑히고, 이듬해 토론토연극비평가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연극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드라마 제작이 확정된 후 최씨는 드라마 공동제작과 극본을 맡았다. 드라마는 방영 3개월 만에 약 93만 명의 고정 시청자를 확보했으며, 시즌2를 연이어 성공시켰다.
주인공 대부분을 실제 한국계 배우들이 맡았다는 점도 몰입도를 높였다. 드라마에서는 아들 정 역을 맡은 중국계 미국인 배우 리우 시무를 제외한 이선형(김상일 역), 윤 진(김용미 역), 방 안드레아(자넷 역) 모두 한국계 배우로, 이들은 한국어 대사는 물론 콩글리시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해냈다. 배우 이선형은 <김씨네 편의점>으로 2017년 ‘캐나다 스크린 어워드(Canadian Screen Awards)’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김씨네 편의점>의 성공은 물론 할리우드에서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은 한국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서구 문화권에서 유색인종의 인구 비율은 점차 높아졌으며 경제·문화적으로도 힘이 커지고 있다. 또한 ‘非백인’ 중심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방송·영화인들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탈 화이트워싱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콘텐츠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 때, 우리의 드라마·영화 콘텐츠는 이러한 흐름에 얼마나 동참하고 있을까.
단군신화에서 유래한 단일민족 신화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법무부는 이미 2016년 국내 체류 외국인 수가 2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3.9% 수준으로, 이 중 절반은 중국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 중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을 담보한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최근 몇 년간 중국 동포 캐릭터를 등장시킨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했지만, 대부분이 이들을 ‘범죄집단’으로 묘사하거나 배척할 대상으로 그려 논란이 됐다.
중국 동포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들, (좌측부터) <황해>, <청년경찰>, <범죄도시>
<김씨네 편의점>이 만들어진 캐나다에서 한인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0.5%(2016년 기준)에 불과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 담보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또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다문화주의 토양을 먼저 다지는 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영화(movie)가 아니라 하나의 움직임(movement)이다.”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연출한 존 추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도 다문화주의 토양의 밑거름이 될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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