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퍼스트맨>은 2.35:1의 와이드 스크린 비율의 영화인데 주인공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과 그가 처한 현실을 탁 트이게 펼쳐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갑갑하게 시야를 제한하기 위해 화면비를 역설적으로 이용하는 영화다. 그러다가 후반부에 닐이 달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장면으로 화면비가 바뀌면서 (동시에 음향도 소거되면서) 무중력 상태의 달이라는 공간을 추체험하게 만든다. 오직 우주와 땅바닥이 닿아 있는 달의 지평선. 만약 VR로 이를 구현한다면 어떻게 연출했을지 상상해보자. 우주선의 좁은 공간에서 우주복까지 입고 있어 시야각이 제한된 비행사가 낑낑대며 우주선 계단을 내려가 처음으로 달의 표면을 둘러보려고 고개를 돌려볼 때의 1인칭 시점에서의 순간. 불안한 핸드헬드(hand-held)와 그걸 지켜보는 비스듬한 시선, 그 전쟁 같은 카메라 워크와 사각의 프레임 없이도 무중력의 갑갑함, 혹은 먹먹함을 전달 할 수 있을까. 기존의 영화 문법이 지닌 장점을 뛰어넘는 VR만의 고유한 문법을 전 세계 감독들이 도장 깨기 하듯 차근차근 극복해나가는 중이다. 지금까지 어떤 작품들이 이를 해결해나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알렉상드르 아야 감독의 영화 <캠프파이어 크리퍼스>
2D영화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360도 영상의 특징을 활용한 사례 가운데 먼저 국내의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한국영화아카데미의 KAFA+ NEXTD교육 과정이 배출한 작품 가운데 올해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뉴미디어VR 부문에 출품한 배경헌 감독의 <의릉>. 이 작품의 주인공은 꿈을 꾸는 듯한 모호한 현실에서 혼란을 겪는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다른 사람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상황을 관객이 360도로 둘러보게 되면 실은 관객의 시점 뒤편에 주인공과 흡사한 다른 인물이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보게 된다. 여기서 좀 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면, 컷 없이 인물의 등장만으로 시공간이 뒤틀려 있음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객은 하나의 공간을 둘러보지만 사방이 같은 시간대나 같은 공간일 필요가 없다. 사방을 둘러보는 행위만으로 시점을 변화시키는 내러티브 전략을 고민한 사례로는 덱스터와 장현윤 감독이 협업한 <프롬 더 어스>가 있다. 후반부의 어떤 장면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데 그 장면을 ‘보기’ 직전까지는 사실 1인칭 시점의 ‘나’가 누군지 관객은 모른다는 게 핵심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고개를 돌려야’ 작품의 주제가 성립되는 이야기다. 이 또한 ‘360도 영상’ 특유의 스케일을 활용한 예다.
<힐즈 아이즈>, <혼스>를 연출한 알렉상드르 아야 감독은 <캠프파이어 크리퍼스: 미드나잇 미치>, <캠프파이어 크리퍼스: 더 스컬 오브 샘> 연작 시리즈를 통해서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360도 영상’이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오히려 사방을 둘러볼 수 없게끔 심리적 제약을 줌으로써 공포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예를 들면, 늑대인간의 무자비한 학살극이 펼쳐지는 숲 속에서 사방에 시체가 나뒹구는 와중에 관객의 시선은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하게 되니, 고개를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산 속에서 만난 연쇄살인마의 극악무도한 살인행각을 직접 겪어볼 수 있게 만드는 순간도 등장하는데, 관객으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를 돌려 상황을 외면하고 싶게 만든다. 이 작품들 모두 고개를 돌려본다는 행위를 어떻게 스토리 안에 녹여낼 수 있을지를 고심한 실사 기반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 모두 기존 영화의 프레임 제약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돋보이는데 앙헬 마누엘 소토 감독
의 <디너 파티>는 카메라의 위치를 극복하려 한다.
1960년대 UFO에 납치됐다 풀려난 것으로 알려진 베티와 바니 힐 커플의 이야기를 체험하게 만든 이 작품은 VR만의 카메라 워킹 문법을 시도해 평화롭게 인물들이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 그리고 그들이 UFO에 사로잡혀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는 과정 ‘속으로’ 관객을 천천히 안내한다. 이들 모두 기본적으로 360도 실사 영상 촬영 혹은 애니메이션 기반의 작품인데 2018년 선댄스 국제영화제 뉴프론티어 섹션에서 소개됐던 마르틴 알레, 니코 카사베키아 감독의 <배틀스카>는 기존의 영화 문법이 아닌 시네마틱 VR의 문법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16살 소녀 루페가 교도소에서 친구 데비를 알게 되어 ‘펑크’ 음악을 만들게 되는 이야기인데, 루페가 일기장을 바탕으로 노래를 만들고 펑크 밴드를 하게 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요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의 자유로운교차를 기반으로 한, 흡사 무대 연출에 가까운 장면 퍼포먼스가 눈앞에 펼쳐지고, 소품과 대사의 활용이 공간과 프레임의 제약을 뛰어넘어 펼쳐진다. 컷 편집 대신 관객이 바라보는 시선을 의도적으로 바꿔주는 스테이지의 등장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다. 이를테면, 관객이 예능 프로그램을 찍는 열 대의 카메라 자체가 되어 계속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카메라를 바꾸어 찍게 되는 (시선을 변경하게 되는) 것이다.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의 제약과 VR의 만남에 대한 흥미로운 또 다른 사례로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VR Cinema in BIFF’ 섹션에 초청됐던 소우 카에이 감독의 <결혼반지 이야기 VR>를 꼽을 수 있다. VR로 일종의 만화책을 보는 형식을 고안하여 만화책의 고정된 프레임을 자유자재로 눈 앞에 펼쳐놓는, 이른바 ‘라이브 스크린’ 형식을 시도했다. 영화 스크린이란 프레임의 제약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고, VR이라고 해서 꼭 360도 전체를 둘러보지 않아도 된다는 시야의 제약을 되려 장점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그 밖에 복운석 감독의 <탐정 K>는 360도 영상 위에 또 다른 화면을 겹쳐 놓는 방식으로 다면 스크린 형태를 재해석했고,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시각미술 변천사 1: 캐나다 VR 영화’ 전시에서 상영됐던 갤런스코러, 타일러 앤필드 감독의 <보이지 않는 세계>란 작품은 가상의 공간 안에 거대한 3개의 스크린을 벽면처럼 크게 펼쳐놓은 뒤에 각기 다른 영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방식으로 스크린의 확장을 꾀한다. <결혼반지 이야기 VR>과 <탐정 K>, <보이지 않는 세계> 등의 사례는 360도 영상 촬영 기반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자유롭게 프레임의 제약과 확장을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앙헬 마누엘 소토 감독의 영화 <디너 파티>
촬영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은 곧 촬영할 피사체나 공간, 즉 카메라에 담는 모든 것의 접근이 달라진다는 말과 같다. 일례로 360도 전체를 둘러볼 수 있다는 특징을 기록물로서의 다큐멘터리에 그대로 접목한 사례가 있다. ‘동두천 외국인 관광특구’라고 불리는, 한국 내 미군기지 주변 기지촌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경험하게 하는 김진아 감독의 <동두천 VR>이나 평창 동계 올림픽을 주제로 장애인 올림픽 팀인 파라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의 동계훈련 현장을 VR로 담은 박규택 감독의 <바람>과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동두천 VR>은 영화가 시작하면 360도 영상으로 촬영된 동두천 기지촌 어느 골목 앞이 보이는데카메라가 움직이거나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되어 있어서 HMD를 쓴 관객 스스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그러다 몇 번의 장면 전환이 이뤄지면서 낮과 밤이 바뀌고 넓은 골목에서 좁은 골목으로 공간이 이동하기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관객은 카메라가 비추는 골목을 계속 걷고 있는 한 여성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카메라가 도착하는 공간은 그 여성의 좁은 방안이다. 관객들로 하여금 갑갑하고 우울한 거리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어느 여성의 허름한 쪽방 생활을 눈앞에서 ‘경험’하게끔 해주는 것이 이 다큐멘터리의 어떤 목적이다. “동두천이라는 공간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관객이 그 속에서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읽어내길 바랐다”는 김진아 감독에게는 여성의 신체에 대해 기존의 영화가 늘 보여줬던 방식이나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VR이 필요했을 것이다. 김진아 감독은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거나 섹스어필의 소재로 사용하곤 했던 기존 영화의 관점에서 벗어나 대체 영상을 만들어보길 원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녀는 이 사건의 영상화에 담긴 ‘윤리적 재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실사 영화보다 VR 영상으로 만드는 것이 옳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말을 되새겨보면 VR 영상의 특징 즉, 관객이 360도 영상 안에서 어디를 얼마나 바라보며 무엇을 느끼는가에 따라 자신만의 영화적 경험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매체적 특징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한계도 따른다. 관객의 시선을 연출자가 어떻게 컨트롤 할 수 있을 것인가. <동두천 VR>은 기록물로서의 다큐멘터리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관객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시켜서 지루하게 만드는 단점도 부각시켰다. 한편, <바람>의 박규택 감독은 “장애인 스포츠경기가 일반 경기에 비해 박진감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VR 영상을 통해 보여주겠다”는 연출 의도를 갖고 어떻게 하면 선수의 입장에서 실제 경기에 참여하는 느낌을 살릴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일반 스포츠 영화가 경기의 박진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빠른 편집이나 카메라의 패닝, 달리샷, 줌인과 줌아웃 등의 촬영 기법은 이 작품에서 쓸 수가 없었다. 카메라 시점이 좌우로 조금만 흔들려도 헤드셋을 쓰고 보는 관객이 심한 멀미를 느끼기 때문에 카메라를 움직여야 할 때는 최대한 직선거리를 활용했다. 물론, 멀미를 유발하지 않을 정도의 부드럽고 유려한 카메라 움직임도 고민했다. 하지만 <바람>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360도로 촬영 가능한 카메라를 어떤 공간에 위치시켜야 위태롭고 신기한 경험을 제공할 것인가, 즉 카메라의 위치도 고민한다. 사람이 아니라 경기 도구인 ‘퍽’의 시점에서 경기를 경험할 수도 있는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이는 물론 극영화에서도 카메라의 시점을 이용해 연출할 수 있겠지만 VR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편집 없는 몰입을 느끼게 해줬다.
360。 영상 촬영을 위한 전용 카메라와 360。 영상을 편집하는 풍경
앞서 언급한 모든 작품이 360도 촬영에 기반을 둔 VR 영화로서의 새로운 문법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훌륭한 사례다. 그 중 올해 CGV 4DX관을 통해 관객과 만난 구범석 감독의 <기억을 만나다>를 따로 강조하고 싶다. 이 작품은 구체적으로 360도 영상 촬영 기반의 실사 작업도 충분히 한 편의 상영용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구범석 감독은 이 작품을 연출하면서 그리고 VR 콘텐츠를 개발하면서 이 기술의 가능성을 “교감에서 찾았다.”고 말한 적 있다. 그 말인즉슨, 사람들이 으레 VR은 액션이나 호러 등 장르적인 충격 효과를 주는데 용이한 매체라고 여길 법한 고정관념을 깨겠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장르가 멜로다. 이미 프로듀서가 단편영화 시나리오용으로 써놨던 이야기를 포맷만 2D 대신 VR로 선택해 찍은 작품인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일반 영화 문법과 비교할 수 있겠다.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기억을 만나다>가 기본적으로 2D 상업영화의 정서와 드라마 작법을 그대로 갖고 오면서, VR만의 표현방식을 앞세워 감동을 유발시킨다는 전략을 취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시야각 밖의 상황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60도 전체를 활용한 장면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클로즈업 장면이다. 일반 영화와 달리 360도의 영상을 얻어내야 되기 때문에 카메라가 피사체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카메라 자체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클로즈업 장면을 보게 되면 관객 스스로가 인물들과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이 바라 볼 수 있는 두 대상을 관객과 일직선상에 놓고 마주보게 하여 관객이 180도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장면도 있다. 심지어 이 작품은 과감하게 컷 편집도 도입했다. 구범석 감독은 “VR 영상에서는 카메라를 갑자기 180도로 돌리면 관객이 인지 부조화를 겪을 수 있지만, 아예 컷을 하고 다른 상황을 보여주면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2D 문법과 VR 문법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찾았다.”고 말했다. <기억을 만나다>의 성과라면 일반 영화의 문법을 과감하게 VR로 옮겨와 활용하는 도전을 했다는 데 있다. 와이드 스크린 형태의 영화와 VR 영화는 막연히 다를 것이라는 선입견을 조금은 깨뜨리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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