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상발전소/칼럼 인터뷰

일러스트레이터 이승정 인터뷰, 마음을 이끄는 행복한 발걸음

by KOCCA 2016. 1. 19.


요차불피(樂此不疲), 좋아서 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는다는 사자성어다. 흔히 일러스트레이터는 수십 개의 직장에 수십 명의 상사를 모시며 작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프로젝트마다 각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범위 내에서 그들이 상상하는 이미지와 작가가 구현하고 싶은 작품과의 교집합을 찾아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난한 조율 과정마저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즐거움이라는 행복한 일러스트레이터 이승정을 만났다.


▲ 사진1. 작가가 그린 밤도깨비 야시장 마스코트가 들어간 포스터


서울 밤도깨비 야시장에 가면 가장 먼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존재가 있다.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흥을 돋워주는 야시장의 마스코트 밤도깨비가 그 주인공이다. 귀엽고 친근하면서 해맑아 보이기까지 하는 이 도깨비 캐릭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했는데 페스티벌에 꼭 맞는 화려함과 낙천적인 작가의 색이 어우러져 탄생한 것이었다.


Q. 어떻게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나?


A. 학창 시절 디자인을 전공해서 처음에는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디자인 회사에서 1년 반 정도 일하면서 일러스트 작업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우연히 사보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디자인할 때와는 다른 재미를 스스로도 느끼게 되었다. 디자인 작업보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그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그러는 사이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사직을 결정한 뒤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Q.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고 괴로웠을 때를 뽑자면 언제인가?


A. 최근 6개월 동안 진행해온 월간엽서를 쉬게 되었다. 특별한 주제 없이 진행해온 작업을 전체적으로 보충하고 제대로 된 컨셉과 목표를 가지고 진행하고 싶어 잠깐의 휴식기를 갖기 시작한 것이 여름이었는데 벌써 겨울이 되어버렸다. 매달 그려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잠깐은 여유로움을 만끽했지만, 곧 스스로와의 약속을 어긴 것 같아 몹시 괴로운 6개월을 보냈다. 불편한 마음이 큰 휴식 기간이었지만 더 좋은 작품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었다고 다독이고 있다.


Q. 월간엽서란 어떤 프로젝트인가?


A. 편집디자이너를 그만두면서 ‘내가 정말 그리고 싶은 그림을마음껏 그리자’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 달에 세 종류씩 ‘내가 생각한 그림을 엽서로 만들어보자’고 나와 약속했다. 판매 목적도 아니고 전시 목적도 아닌 온전히 나를 위한,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프로젝트였다. 그렇게 개인적인 목표로 시작한 작업이었는데 좋아해주는 팬이 생기고 블로그를 통해 구매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홍대 Object 매장에서도 판매되기 시작했다.


Q.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


A.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위에서 이야기한 월간엽서 중 2014년 9월 엽서 ‘하고싶은말’이다. 월간엽서 가운데 가장 처음으로 그린 작품이라 별다른 고민 없이 편하게 작업했다. 영화를 보면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행복한 기분으로 임했다. 그렇게 작업하는 방법이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Q. 반대로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이 있다면?


A. 월간엽서도 그렇고 청탁에 의한 삽화나 포스터 작업도 그렇지만 그릴 때는 항상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작업을 끝내는데 막상 결과물이 나오면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눈에 보인다. ‘색은 왜 이렇게 썼을까, 이걸 왜 여기 배치했을까, 저기다 그렸으면 더 예뻤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곤 한다. 완벽하게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작품을 그린 작가가 있을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그렇게 최선을 다한 나 자신에게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 사진2. 일러스트레이터 이승정


Q. 일러스트레이터로 살기에 작업 환경은 어떠한가?


A. 요즘 열정페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 일을 시작하면서 새삼 와 닿을 때가 있다. 직장 생활과는 다른 차원으로 나의 열정과 노력을 강요받는 일이 많다. 특히 열정페이를 강요받는 문화예술인 가운데 일러스트레이터는 유독 다른 영역보다 갑이 아닌 을로 자리한다. 글을 쓰는 작가, 화가도 아닌 일러스트레이터는 한국에서 능력을 인정받아도 좋은 대우를 받기 힘들다.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범위 내에서 작업을 해야 하고, 텍스트의 부속품이라는 인식이 많아 정당한 대가를 받기 힘들다. 더 나아가 “대충 하나 그려줘!”라는 말을 쉽게 듣기도 한다. 작가에게 결코 유쾌할 수 없는 말인 거 같다. 이러한 인식을 심도 있게 바라볼 때인 것 같다.


Q. 다채로운 색감에 독특하고 기발한 작품이 많아 보인다. 특별히 선호하는 작업 스타일이 있는지?


A.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작가마다 다양한 스타일이 있겠지만 나는 현실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그림보다는 공상의 세계를 재치 있게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자유롭게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어서이기도 하고 정답이 없으니까 정말 무한대의 시도를 해볼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정해진 답이나 주제가 너무 분명할 때 오히려 그리기가 어려운 것 같다. 이런 경우 반짝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넣고 싶어도 망설여지는 부분이 생긴다. 


Q.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하는 특별한 슬럼프 극복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


A. 일정을 정확하게 지켜야 하는 작업인데 시간의 압박을 느껴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일단 작업대에서 멀리 나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뭘 하려고 하면 더 생각이 엉키는 것 같아서 무념무상으로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않고 시간에 날 맡긴 채 정말 가만히 있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덜컥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어떻게 푸는 것이 좋을지 실마리가 보이기도 한다. 이번에 6개월 정도 충전할 수 있는 기간을 가지면서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그러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다 비우고 나니 또 하나씩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Q. 나의 생각을 100% 담아낼 수 없는, 클라이언트와의 조율이 필요한 창작업이다. 그렇다고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한 환경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러스트레이터의 길을 가는 이유

는 무엇인가?


A. 질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조율하는 과정에서 속상할 때도 있고, 일방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맞춰달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내 그림으로 녹여내며 다 같이 만들어 간다는 느낌이 있어 좋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책이나 작업이 완성되는 거니까. 나뿐만 아니라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 조금씩 포기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과 조율해나가는 것도 재미있는 과정이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보람과 희열이 마음에 큰 안식을 준다. 


▲ 사진3. 엽서를 그리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이승정


Q. 일러스트레이터로 살면서 꼭 지키고 있는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


A. 시간 약속! 마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한다. 일반 직장생활이라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작업 특성상 쉽게 안 풀리는 경우가 있다. 도와줄 사람도 없고 대신할 사람도 없다. 너무 힘든 나와의 싸움이지만 오로지 내 능력이 반영된 그림의 퀄리티만으로 신뢰감이 결정되므로 어떻게든 시간 내에 최대한의 완성도를 선보이고자 한다. 그리고 삽화 작업은 의뢰한 곳에 대한 정보와 텍스트에 대한 이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좋은 그림이 나오질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면 내가 작업해야 하는 대상에 대해 꾸준히 공부한다.


Q. 작가에게 창작의 의미와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다.


A. 나에게 그림 그리는 작업은 일이라는 생각보다는 어릴 때 하던 인형놀이를 하는 기분이다. 인형을 놓고 뭘 입힐까 고민하고 집을 만들어주고 요리를 해주던 행동들이 지금 내가 하는 일러스트 작업과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다. 어떤 프로젝트라도 주제가 있고 내용이 있다. 나는 거기에 나의 상상을 더해 꾸미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꾸미냐는 것은 다 내 몫인데, 어느 공간에 어떤 색을 입히고 어떻게 보여주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다 보면 인형놀이를 하던 그때와 다를 바 없이 재미있다. 내가 상상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어 뿌듯하고 행복하다. 일러스트레이터란 자신의 생각을 선명하게 담아 보여줄 수 있는 창작자라고 생각한다. 한때 그저 ‘남들 눈에 예뻐 보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내가 그리고자 한 세계가 아니라 보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취향을 좇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괴로운 적도 있는데 지금은 그런 고민을 끝내고 흔들림 없이 온전히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창작자가 되려고 노력 중이다. 


 ⓒ 출처

K-contents VOL. 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