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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칼럼 인터뷰

작은 왕국을 만나다

by KOCCA 2015. 9. 11.

작은 왕국을 만나다.

 

글. 김전한 (시나리오 작가,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이사)

 

도서관은 또 다른 왕국이다. 서가에는 많은 인물들이 있고 숱한 사연들이 있고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흔적들이 고스란히 있는 곳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서식지의 이동이 잦았다. 주소지 변경이 첫 번 째이고 두 번 째로 하는 일이 새로운 도서관을 발견하고 탐색하고 그 곳의 품성을 알아보는 일이다. 도서관이 비슷한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품성이 뚜렷하다.

 



회원증을 발급받고 책을 대출받는다. 나는 이제 이곳의 시민이 된다. 착실하고 규칙을 잘 지키는 건전한 시민이 되겠노라고 선서라도 하고 싶다. 그러나 도서관은 관대하다. 시민권을 내어주면서 선서까지는 요구하지 않는다.

 

은행의 대출도 도서관 대출만큼이나 쉽고 친절하다면 세상은 몇 배나 아름다워 질것이라는 환상을 품어보기도 한다.

 

서울에서 안동의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에 갔다. 미팅 시간이 남아서 건물의 여섯층을 어슬렁,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그곳을 만났다. 4층에 희한한 공간이 있었다. 아이들 놀이터 같기도 하고 도서관 같기도 하였다. 그 곳의 끝자락에 작은 방이 있었다. 작은 방에 천정은 높고 그 높은 천정 끝까지 책꽂이가 있었고 책들은 대체로 한서 고전물 이었다.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곳은 투명한 심해 속과 같았다. 분주한 일상은 일순 진공으로 치환되었다. 시간의 진공은 사람을 투명하게 해준다. 책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나는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책 향기와 함께 눈을 감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공간이었다. 잠시 뒤 눈을 떠보니 삼십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머리가 맑아졌다. 도서관 마니아로 자처해온 나로서도 드물게 만나는 신기한 공간이었다.

그 작은 방에서 나와 천천히 서가를 둘러보았다. 바깥쪽은 그 작은 방과는 또 다른 세계였다.

도서관의 엄숙함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서가의 책들엔 분류표가 없었다. 그리고 상당 분량의 만화책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공간 배치는 아이들이 편히 놀 수 있게 디자인 되어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도발적인 기획을 하였을까?

 

이렇게 의문스러운 도서관은 처음 만났다.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서 이 도서관을 처음 기획하게 된 직원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도서관 이라면 책 분류표가 기본일텐데 기본부터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검색을 하고, 분류표 번호에 따라 딱 그 책을 찾으면 편리하겠지요. 그러나 작은 불편함이 있더라도, 책을 찾기 위한 수고로움의 순기능이 있지요. 물론 전체 카테고리는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그 책을 찾기 위해 서가에 꽂힌 책들을 하나씩 하나씩 훓어보는 재미란게 있지요. 물론 대형 도서관에선 불가능하겠지만 이런 작은 도서관이라면....”

 

 

작은 도서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패턴에 따르지 않고, 작은 수고로움 속에 숨겨진 순기능을 예측하는 도서관. 작가에게 도서관은 삶의 현장이고 일터같은 곳이다. 안동으로 이사해 오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

 

그 작고 희한하고, 조용한 놀이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안동으로 이주해 오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 그리고 빌어본다. 지금의 개성만큼이나 패턴에 휘둘리지 않고 작고 아름다운 왕국의 모습이 지켜지기를...



 - 위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산업정보포털 지식라운지 <전문가 칼럼>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