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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문화기술

환상 속 나를 만나는 시간, <헤세와 그림들 展>

by KOCCA 2015. 8. 24.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은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등 명작을 많이 남긴 소설가이자 시인 헤세. 그는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오늘날 ‘괴테 이후 독일 문학의 정통을 이은’ 작가라는 평을 받기도 하는 저명한 작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헤세의 그림은 그의 글과 함께 어우러진 삽화가 되어 글의 느낌을 누구보다 더 잘 표현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풍경을 재현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전시 <헤세와 그림들 展 :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하 헤세展)은 그러한 화가로서의 헤세에 주목해 기획되었는데요.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지난 5월 2일부터 시작되어 8월 30일까지는 ‘헤세의 초대’라는 테마로, 9월 1일부터 11월 1일까지는 ‘헤세의 가을’이라는 테마로 전시될 예정이랍니다. 이번 헤세展에서는 헤세의 후손들로부터 양도받은 그의 사진, 유품, 초판본, 그림 등의 작품 500여점이 전시되며, 회화에 디지털 기술을 결합해 그의 그림을 HD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기도 해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과연 얼마나 풍성한 볼거리로 채워져 있는지, 함께 살펴보실까요?



바람에 따라 나무가 흔들리고, 꽃이 흩날립니다. 날이 밝았다가 밤이 되어 어두워집니다. 강아지가 풀숲을 기웃거리고, 강아지를 따라 소년소녀가 뛰어오기도 하죠. 이 모든 게 다 ‘그림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헤세展의 가장 큰 특징은 작품을 ‘컨버전스 아트’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컨버전스 아트란 아날로그로 그려진 그림을 첨단 디지털기술로 재해석한 것으로, 국내 미술전시에서는 2014년 10월에 열렸던 <반 고흐 : 10년의 기록 展>에서 최초로 시도되었죠. 고흐展은 20만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이번 헤세展 또한 고흐展을 성공적으로 선보였던 연출진이 참여해 만들어진 전시입니다.


▲ 사진 1 컨버전스 아트


감각적인 조명과 영상 관련 기술, HD 프로젝터가 결합되어 디지털 기법을 통해 재해석된 헤세의 그림들을 만날 수 있는 헤세展. 마음을 파고드는 음악이 울러 퍼지는 전시회장 속, 작은 종이에 그려졌던 그림들은 커다란 벽을 캔버스 삼아 환상적으로 구현됩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섬세하게 표현되기도 하고, 완성된 그림 속 풍경은 바람에 따라 움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시방식은 기존의 전시가 갖던 평면적, 정적인 특성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특성을 가집니다. 작품을 겉에서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죠. 이러한 예술과 디지털의 결합인 컨버전스 아트는 IT 기술력이 뛰어난 우리나라에서 더욱 더 주목하고 발전시켜야할 방식이기도 합니다.



▲ 사진 3. 헤세의 사진과 그의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는 벽


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창조, 자유에 대한 열망이 너무도 커 억압적인 신학교를 뛰쳐나온 헤세. 그는 방황과 탈선에 빠져 지내다가 문학과 함께 안정을 찾아가지만, 이후에도 여러 심리적 위기를 겪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열렸을 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하던 그는 독일에서 배신자라 낙인 찍혔고, 출판금지를 당합니다. 아내와의 별거와 아내의 정신병, 아들의 중병, 아버지의 사망 등의 사건이 휘몰아치면서 그의 내면은 엄청난 상처로 얼룩지기도 하죠.


이후 그는 스위스로 망명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풍경과 함께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데요. 그렇게 점점 회복하게 되고, 1946년에는 1943년 출간한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의 고향 독일에서도 그가 주장했던 평화주의를 인정하고, 헤세는 그가 태어난 칼브시의 명예시민이 되기도 하죠. 그는 그제야 찾아온 진정한 평화와 함께 긴 삶의 여행을 끝내게 됩니다.


▲ 사진 4. 전시관 6개 ZONE 입구


전시관은 위에서 이야기한 그의 일생에 따라 총 6개의 존으로 나뉩니다. 헤세의 초대, 방황과 고통, 우정과 사랑, 치유와 회복, 평화와 희망의 순서대로 그의 작품세계를 관람할 수 있는데요. 벽면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영상, 그의 목소리로 녹음된 시 낭송 듣기 등을 통해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여러 작품들과 함께 그의 삶을 함께 걸어가보게 되지요. 마지막 존인 헤세의 서재에는 헤세의 소설들이 비치되어 있어 읽을 수 있고, 미디어 포토존, 창의체험존 등도 있습니다.



▲ 사진 5. 관람객들이 작품들을 관람하고 있는 모습


헤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방황하고, 내면에서 고민을 되풀이하며 삶이란 무엇인지를 찾아가는데요. 그들의 모습은 헤세 자신과 닮아 있습니다.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은 헤세를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상처가 다른 이들을 공감케 하고,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이죠. 헤세 자신은 이러한 상처를 그림을 통해 치유했고, 그의 그림은 그의 마지막까지 함께했습니다. 헤세의 그림이 그의 사후 20년이 지난 후에야 공개된 것을 보면 그의 그림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그 자신의 치유를 위한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세의 그림은 그것을 보는 우리들까지도 치유합니다. 하얀 벽에 선이 하나 둘 생기고 색깔이 칠해지며, 그것은 결국 바람 부는 들판이 됩니다. 이러한 것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어떠한 감동을 선사받습니다. 저처럼 미술작품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눈앞에 펼쳐진 커다란 그림과 시를 보면서 한동안 그에 빠져 말을 잃게 되죠. 이런 느낌에 더 깊이, 그리고 오래 머물러 있고 싶다면 헤세展은 홀로 가만히 감상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러한 치유는 반복되는 일상과 스트레스에 지친 현대인들이 잊었던 감성을 회복하게 하고, 감동을 지나 어딘가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디를 떠돌고,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가는 걸까? 곳곳에 전시된 그의 시와 소설들, 잔잔한 듯 소용돌이치는 음악은 그러한 생각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전시의 부제처럼,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사진 6. 미디어 아트로 표현된 헤세의 그림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첫 구절입니다. 다른 이가 아닌 나 자신을 응시하고 탐구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뭘 말하고 싶은지를 깨닫는 것은 정말 중요하지만 동시에 정말 어렵고, 어쩌면 무서운 일이기도 합니다. 헤세 또한 그에 대한 혼란으로 삶에서 몇 번의 위기를 겪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혼란으로 가득한 여행 이후에 평화와 자유를 가진 헤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눈과 귀, 그리고 마음까지 즐거운 전시, <헤세와 그림들 展 :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과 함께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