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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칼럼 인터뷰

토끼는 여전히 게으르고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달린다

by KOCCA 2013. 7. 29.

이상민 (소설가, 칼럼리스트, 컨텐츠 기획자)

  

 

어느 날 토끼가 거북이를 느림보라고 놀려대자, 발끈한 거북이가 토끼에게 달리기 시합을 제안했다. 경주를 시작하자마자 토끼는 보란 듯이 앞서 달리기 시작했고 금세 거북이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자만한 토끼가 도중에 여유를 부리며 잠을 자는 동안, 거북이는 부지런히 움직여 토끼가 잠에서 깨기 전에 경주를 마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이솝우화의 <토끼와 거북이>다. 우화(寓話)는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의 언행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 주변에선 우화 속 이야기를 보는 듯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특히 최근의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의 행보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이 <토끼와 거북이>란 우화를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1995년에 출범한 케이블 방송은 초기만 하더라도 공중파 프로그램을 재전송하는 채널이라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게 사실이다. 자체 제작한 콘텐츠가 미비한 터라 그런 평가를 받은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당시만 하더라도 공중파 방송국들은 OCN을 위시한 케이블 채널들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콘텐츠 보유량과 제작 노하우라는 측면에서 사실 경쟁 자체가 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토끼와 거북이>의 거북이처럼, 케이블 채널들은 당장 눈에 띄지 않아도 조금씩 자기들만의 콘텐츠를 만들어갔다.


공격적으로 외국TV 드라마들을 프라임타임에 배치하는가 하면, 공중파에선 소화할 수 없는 다양하고 파격적인 콘텐츠들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시청자의 관심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를 테면 케이블 채널에서만 방영하는 드라마들을 제작한다거나, 다소의 비판을 감수하면서 자극적인 성인용 콘텐츠를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공중파방송이 자기복제를 하며 느린 행보를 거듭하는 동안, 케이블 채널들은 쉬지 않고 자기들만의 영역을 구축해나갔다. 그렇더라도 소위 대박이 시청률 1% 수준에 그치는 케이블 채널의 점유율은 공중파 입장에선 그다지 위협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2009년에 음악전문 채널인 엠넷에서 제작한 <슈퍼스타 K>의 등장으로 상황은 완전히 급변했다. 이른바 ‘대국민 오디션’이란 컨셉을 내세운 <슈퍼스타 K>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동시간대 공중파 프로그램을 압도하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고, 급기야 이듬해에 방영된 시즌2에서는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오디션 프로그램’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슈퍼스타 K>의 후폭풍에 공중파 채널들은 자존심을 꺾고 사실상 똑같은 컨셉의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MBC는 <위대한 탄생>을, KBS와 SBS는 각각 <탑 밴드>와 <K팝 스타>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선보였지만 매 시즌마다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슈퍼스타 K>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일종의 괘씸죄를 적용한 것인지 한때 공중파에서 <슈퍼스타 K> 출신들을 보이콧한다는 후문이 떠돌기도 했었다. 야심차게 시작한 <탑 밴드>는 이미 종영했고, <위대한 탄생>은 방영시간을 앞으로 당겨 정면대결을 피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패배를 인정한 셈이다.

 

 

케이블 채널의 약진은 드라마에서도 눈에 띄는 두각을 나타냈다. 공중파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로운 창작환경인 탓에, 상대적으로 다양한 장르와 파격적인 이야기를 다룰 수 있어 <신의 퀴즈>, <뱀파이어 검사>, <특수사건 전담반 TEN>과 같은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이 제작되었고 열렬한 지지층을 얻고 있다. 특히 작년 여름에 방영한 <응답하라 1997>은 공중파 드라마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이런 결과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외국드라마로 길들여져 눈높이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시청자들의 입맛은 갈수록 까다로워지면서 공중파 드라마(물론 간간히 잭팟을 터뜨린 작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현재 상황을 고려한다면 케이블 채널의 드라마에 대한 수요는 앞으로도 점점 더 늘어날 전망이다. 소위 국민 드라마라고 불리는 시청률 40%대 드라마의 실종, 쪽 대본을 위시한 열악한 제작 현장의 문제, 전작의 인기만 빌려온 이름뿐인 시즌제 드라마, 외주제작사와 얽힌 잡음들이 끊이지 않는 공중파 드라마와는 차별적인 노선을 걸어왔기에 이러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연속극 형태가 아닌 매회 하나의 에피소드만을 다루는 시추에이션 드라마라는 점, 고정 배우로 이뤄진 레귤러 출연진, 흡사 영화를 보는 듯한 화면연출과 뛰어난 CG효과, 완성도 높은 대본 등은 때로 <CSI>와 같은 미국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실제로 <뱀파이어 검사>는 TV쇼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까지 진출하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예능 프로그램에서조차 장담할 수 없다. 물론 유재석과 강호동이라는 양대 MC가 버티고 있는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은 아직까지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앞선 예와 마찬가지로 케이블 채널의 도전도 만만치가 않다. <개그 콘서트>를 제외하면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시피 한 공중파 채널에서 설 자리를 잃은 개그맨들에게 새로운 무대를 제공하고 있는 <코미디 빅리그>는 벌써 네 번째 시즌을 맞고 있고, 미국 NBC방송국의 간판 장수 코미디 프로그램인 <SNL>의 판권을 사와 2011년 12월 3일부터 방영하기 시작한 <SNL코리아>는 매주 인터넷 검색 순위 상위를 차지하는 인기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토끼처럼, 느림보 거북이로만 여겼던 케이블 채널에 어느새 이렇게 추월당하고 있다. 아마도 이십여 년 전 케이블 방송이 처음 출범할 때만 해도 이러한 현상이 벌어질 거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공중파 방송에 대한 인식이 상업적 기능보다는 공영성을 더 요구받고 있기에 태생적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방송 민영화라든가, 간접광고에 대한 규제 같은 문제도 앞으로 풀어 가야할 숙제고 이런 부분들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논의가 오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영국의 BBC나 일본의 NHK처럼 공영방송으로서의 존재가치도 중요하다. 단지 상업적인 성과만으로 평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SBS는 차치하더라도 KBS와 MBC, 두 공중파는 매우 중대한 기로에 와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처럼 공영방송으로서의 역할과 상업적인 기능을 모두 좇다가 어느 하나 제대로 성과를 얻기 힘들지도 모른다. 이것은 공중파 채널들이 어떻게든 풀어야할 숙제다. 이솝우화의 토끼처럼 거북이에게 추월당하고 경주에게 질 것인지, 아니면 분발해서 경주를 이길 것인지, 선택과 노력은 그들이 몫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청자들의 요구는 계속 변화하고 늘어날 테고, 더는 이전과 같은 입장에 있진 않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토끼도 거북이처럼 부지런해져야하는 시대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이야기 속이 아닌 현실에서도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날이 오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