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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KOCCA 행사

월산, 우리우리 설날을 있게 한 사람

by KOCCA 2012. 11. 30.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구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설날이 불과 2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
혹시 알고 계셨나요?


사라질 뻔한 설날을 되찾은 우리문화 수호자
그 사람은 누구인지 함께 만나보시겠습니다.

 

 

우여곡절 많았던 '설날' 정착기


 오늘날 설날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력 1월1일' '구정'을 떠올리실껍니다. 그러나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설날'은 달력에 표시되지 않는 평범한 날 중에 하나였습니다. 한민족의 고유 명절이라 함은 설과 추석이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데, 어째서 그 시절에는 설날이 없었을까요?


 설날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서기 488년 신라 비천왕 시절부터 지내온 명절이였습니다. 음력을 따르던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1월 1일 설날은 한 해를 시작하는 날로 상당히 중요한 명절 중 하나였지요.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때 들어온 양력의 영향으로 양력과 음력 1월 1일이 함께 쓰이다  1910년 병술국치를 겪으며 양력 1월 1일만이 공식적인 휴일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음력 설은 국가 운영상 불필요한 날로 인식되어 부활되지 못했습니다.


 1980년대 정부에서 공휴일 제정위원회가 열리고 음력 설의 부활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구정은 '구시대적 미신'이라는 종교적인 반대와 '기업 생산성 악화'라는 경제계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 상당한 진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음력 설은 '구시대 유물의 회귀'가 아니라 '잃었던 설날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라는 것이라 강조하고, 1985년 음력 1월1일이 '민속의 날'로 지정되고 5년 뒤 '설날'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음력 1월 1일은 1985년 '민속의 날'로 지정되고 5년 뒤 '설날'로 다시 지정되었습니다

 

 

'설날' 지킴이, 월산 임동권 박사


 가시밭길을 헤집고 돌아온 우리 '설날'. 그 뒤엔 우리나라 월산 임동권 박사가 있었습니다. 월산 임동권 박사는 국내 민속학 개척자라고 불리우는 손진태, 송석하 박사의 뒤를 이어 민속학의 기틀을 닦은 1세대 민속학자입니다. 1954년부터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를 살리기 위해 대학강단에 서서 후학을 양성하고, 민요·굿·전통무술 등 무형문화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였습니다.


 30여 년간 문화재위원을 지내며 임동권 박사가 살려낸 우리 문화는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음력 1월1일 '설날'을 비롯하여 아리랑, 강릉단오제, 택견 등 지금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무형유산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지요.

 

 

 

 

민속학 1세대, 한국 문화의 학문적 길을 열다

 

 문화콘텐츠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힘, 문화원형과 민속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민속, 콘텐츠를 만나다' 기사보기 클릭)


 월산 임동권 박사는 현재의 민속학을 정립하는데도 큰 힘을 쏟았습니다.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며 '옛 것은 낡은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민속학은 천덕꾸러기 같은 학문이였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중요성이 커지고 문화원형의 개념이 정립되면서 민속학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월산 임동권 박사는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민속학을 학술적으로 정립하고, 대학 민속학과 설립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수 많은 우리 문화를 발굴하고 그에 대한 학문적 기틀을 마련했던 월산 임동권 박사.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25일 저술 중이던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임동권 박사가 타계하였습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꼼꼼히 기록해 미래 세대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게 민속학의 존재 이유다"


사라져가는 옛 것을 지키고
우리 문화를 사랑했던 고인의 뜻을 이어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아끼는 마음을
항상 가슴 속에 품을 수 있는
아름다운 문화인, 자랑스런 한국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