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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방송 영화

사극의 새로운 가능성 - 팩션[faction : fact+fiction]

by KOCCA 2012. 2. 24.

 

사극의 새로운 가능성 - 팩션[faction : fact+fiction] 

장 태 유 (SBS 드라마센터 PD)

 

여러 장르의 드라마 중에서 사극은 유난히 손이 많이 가는 장르다.
우선 수십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오픈세트가 없이는 촬영자체가 불가능하고,
출연자도 현대물에 비해서 두배 이상 많은 데다가,
대본이 늦어지면 촬영은 물론 방송자체가 위험해진다.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현실에서는 보통 연차의 작가는 감히 쓰겠다고 할 수 없고,
모든 작가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쯤 써보고자 하는 드라마의 꽃, 사극.

 

업계사람들이나 시청자들이나 모두들 사극은 웬만하면 히트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만도 않다. 히트할 만한 사극이 아니면 방송사에서 애초에 투자와 편성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단 한편의 사극이 실패하면 방송국, 제작사, 작가, 연출 및 출연자에 이르기까지 관련자 모두에게 골고루 오랜 시간 거대한 상처가 안겨진다. 어떤 제작사는 망하고, 어떤 작가, 연출자는 수년간 일을 못하고, 출연자는 방송계를 떠나기도 한다.
한마디로 관련자 모두에게 큰 각오가 필요한 부담스러운 장르이다.

 

그렇다면 방송국은 이렇게 리스크가 큰 드라마를 왜 제작하는 것인가?
첫째, 스테이션 이미지를 짧은 시간이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 예능, 교양, 드라마 중에 드라마이고, 그 중에 성공할 경우 가장 오랫동안 회자되는 것이 사극이다.
둘째, 실제 성공확률이 현대물 보다 높다. 다른 어떤 드라마와도 유사하지 않은 독창적 이야기 구조에다가 거대한 제작비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극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주몽> <대조영> <선덕여왕>같은 정통정치사극이고, 다른 하나는 <다모>, <대장금>, <허준>, <상도> 같은 영웅적 인물의 성공사극이었다.

 

   

 

선덕여왕 [MBC]                                      주몽 [MBC]

 

허준 [MBC]                                                     대장금 [MBC]

 

몇 년 전부터 이런 사극의 큰 흐름에 끼어든 새로운 주류가 있었으니 바로 ‘팩션’사극이다. 기본적으로 정통사극의 틀을 가지고 있으나 잘 살펴보면 역사적 근거보다는 작가의 창의성에 더 크게 기대고 있는 이야기 구조를 가진 사극들이다.
조선시대 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표방한 <공주의 남자>, 무예도 보통지의 저자 백동수에 대한 본격 무협 환타지<무사 백동수>, 조선시대 천재화가 신윤복이 여자였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바람의 화원>, 한글창제 직전에 일어났다고 가정한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사건에서 출발한 <뿌리깊은 나무>같은 드라마가 팩션 사극이라 할 수 있다.

 

공주의 남자 [KBS]                                                무사 백동수 [SBS]

 

바람의 화원 [SBS]                                           뿌리깊은 나무 [SBS]


실제 역사적 사건이나 실존인물 이야기에 독창적인 작가적 상상력에 기초한 새로운 설정으로 극적인 재미를 끌어 낸 사극이 요즘 들어 사랑을 받는 것은 왜일까.

 

첫째로는 기발하고 탄탄한 원작의 이야기가 있다.

이정명 작가의 ‘바람의 화원’, ‘뿌리깊은 나무’, 정은궐 작가의 ‘성균관스캔들’, ‘해를 품은 달’,  김탁환 작가의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등 5-6년전부터 나타난 새롭고 파격적인 팩션사극 소설들이 드라마에 새로운 원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정명 작가의 [뿌리깊은 나무]                      정은궐 작가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이 원작자들이 다년간의 고민 끝에 만들어 놓은 이야기 아이디어가 단초가 되어 드라마작가들이 살을 붙이자 마치 여러명의 작가가 협업하여 하나의 대본을 완성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작가, 배우, 연출의 역량을 극대화 할 수 있다.

역사왜곡의 논란은 정통사극보다 더 거세지만, 작가의 창작영역은 더욱 넓어지고, 배우의 표현한계도 넓어지고, 연출은 작정하고 더욱 환타지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극 자체의 흥미도를 높일 수 있다.

 

셋째 시청자들이 다양한 장르에 목말라 하고 있다.

드라마왕국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새로운 드라마는 나오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세계 어느나라 보다도 많은 드라마 제작량으로 인해 드라마들은 어느 정도 서로 닮은 상태로 태어난다. 엇비슷한 4인3각 멜로라인에 가족 배경이나, 직장 배경 드라마들 속에서 직업군만 계속 바뀌어 가는 드라마 홍수 속에서 팩션 사극은 기존의 드라마 공식을 깨뜨리면서, 드라마라는 컨텐츠를 미스테리, 예술,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시켜주고 있다.

 

결국 팩션사극은 드라마 제작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익숙한 소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면서 극적 이야기 구조가 더욱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왜곡의 비판을 받지만, 이러한 경향은 기존의 사극계 뿐만 아니라 드라마 제작 전반에 새 바람을 불어넣을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