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단어에도 좋고 나쁨이 있습니다. 본뜻과 상관없이 좋은 이미지를 가진 단어가 있는가 하면 까닭없이 비호감인 단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적’, ‘비인간적’이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단어의 본 뜻만 놓고 보면 ‘사람다운 성질’이 있거나 없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만, 본능적으로 인간적인 것은 좋은 것, 비인간적인 것은 나쁜 것으로 인식되고는 합니다.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Humane(인간적인)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으로, Inhumane(비인간적인)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으로 인식됩니다. ‘짐승 같다’는 말을 비난의 의미로 쓰는 것도, 아름답다는 뜻의 ‘미(美)’가 붙은 ‘인간미’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답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은 왜 좋은 걸까요?네온비, 캐러멜 작가의 <지옥사원>에서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이며, ‘인간답다는 것이 왜 좋은 것인가’에 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이자 철저한 외부자인 ‘악마’를 통하여 제기됩니다.
"<지옥사원> 내(內) 악마의 설정"
불지옥을 배경으로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종교적인 악마에서, 파우스트를 졸졸 따라다니는 다소 미련한 악마에 이르기까지, 악마는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하게 묘사됩니다. 특히 현대에는 <악마와 계약연애>처럼 매력적인 외향을 가진 남자 주인공이나 <데스노트>에서처럼 철저한 방관자의 모습으로 개성 있게 변주되기도 합니다.<지옥사원>의 경우에는 악마의 설정이 다소 이중적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지옥에서의 악마들은 인간과 다른 바 없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지옥 대장 크루페논은 악마가 소멸하면 슬퍼하고, 하급 악마 루테로스는 자신의 우상인 악마 쿼터를 동경합니다. 심지어 상급 악마끼리 서로를 질투하고 견제하는 모습까지 보이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반면에 지구에 내려와 인간의 몸속으로 빙의한 악마는 지옥에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인간에 빙의된 악마는 ‘공감능력과 측은지심은 없고, 오직 욕망만이 남아서 철저히 그 욕망의 달성만을 위해서 행동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인간으로 따지면 반사회적 행동장애를 가진, 소시오패스 같은 존재입니다. 실제로 반사회적 행동 장애 환자의 경우 어떠한 행동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이는 공감능력의 결여에 기인합니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현견’이라는 등장인물이 악마 쿼터가 빙의된 인간을 두고 “고순무는 소시오패스야”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설정을 뒷받침 해 줍니다. 다소 이중적인 이러한 설정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인간과 악마라는 존재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류애를 발휘하는 대상이 인간에 국한되어 있듯이 악마로서도 공감이나 측은지심은 악마에게만 발휘되는 성질의 것인 셈입니다. 악마에게 인간은 양계장의 닭과 같은 존재이므로 측은지심을 가질 까닭이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악마는 불행 구슬(작품에서 악마가 사용하는 연료이자 식량)을 얻기 위해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이 달걀을 수거하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과 악마의 비교 분석을 통한 인간다움의 고찰"
<지옥사원>은 이렇게 인간과 상이한 존재인 악마 ‘쿼터’가 ‘고순무’라는 인간의 몸에 빙의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쿼터에게 빙의를 당한 인간은 행동이나 사고방식에서 보통의 인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외향은 인간과 다르지 않지만, 실체는 악마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차이를 인지하는 것이 인간다움에 관한 고찰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있는데, 악마인 쿼터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쿼터에게는 무엇이 없기에 보통의 인간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는 그 차이의 실체가 ‘인간성’이며, 쿼터는 그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의 인간과 다른 행동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인간성의 결여가 ‘도덕성’의 부재로 표현됩니다. 본인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인간이 저축해 놓은 돈을 허락 없이 쓴다든지, 트럭에 치여 죽은 모녀를 보며, 희생자가 본인이 아닌 것에 안도하는 식입니다. 게다가 인간을 경제적 능력에 따라 높은 등급과 낮은 등급으로 구분한다든지 하는, 인간이 했다면 뭇매를 맞았을 말도 스스럼없이 합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간단한 수준의 도덕성도 학습되지 않은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간단한 수준의 도덕성은 작품이 중반부로 가면서 악마도 충분히 흉내 낼 수 있게 됩니다. 그 이후 악마는 도덕성보다 좀 더 고차원적인 ‘예의’를 학습합니다. 예의는 특정 공동체에 따라서 특이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도덕보다 복잡합니다.인간과 구별되는 악마의 특성이 ‘도덕성과 예의의 결핍’이라는 점은 인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즉, 도덕성과 예의가 인간다움 그 자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다움의 한 측면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있는 셈입니다.
"지옥에서 온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지옥사원>에서 쿼터는 도덕과 예의를 어떠한 방식으로 학습했을까요? 놀랍게도 악마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이용하여 주변인에게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해야 하는지’, ‘그것이 단순한 감정 낭비 이상의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원래 그런 것이라면 선량한 인간의 죽음을 이용하는 악인들은 왜 존재하는지’, ‘인간이라고 다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타인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는 것이 인간적인지‘ 등 쿼터는 연이은 의문을 제기하며 인간다움의 본질을 파고듭니다.쿼터의 질문을 받은 인간은 그럴듯한 논리를 들어 설명하려 노력하지만, 결국 모든 대답의 끝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리고 ‘응당’ 그래야 한다는 대답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듯이, 대답하는 사람을 아포리아(Aporia: 막다른 골목)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은 과연 좋은 것인가?"
인간답다는 것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비인간적인 존재이자 철저한 외부자인 ‘악마’라는 점도 흥미롭지만, 더 흥미로운 점은 인간다움에 대한 악마의 결론입니다. 인간답다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독자에게 쿼터의 결론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인간답다는 것은, 개인을 사회에서 도태시키는 ‘약점’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결론이 쉬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높은 등급’의 사람과 ‘낮은 등급’의 사람이 명료하게 구분되는 회사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쿼터의 말에 따르면 회사란 평범한 인간들에게 악마 같은 능력을 원하는 곳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를 창립한 '정진저' 회장 자체가 악마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결론이 회사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적인 모습은 회사 밖에서도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 모습은 고순무에게 빙의한 쿼터가, 애인인 송아리의 부모님에게 결혼 허락을 받는 자리에서 잘 나타납니다. 인간다운 고순무가 못 미덥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던 송아리의 부모님은, 쿼터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결혼을 승낙합니다. 인간다움은 이 사회에서 손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다운 고순무의 귀환을 바라는 사람은 애인인 송아리뿐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쿼터의 말이 맞는지도 모 막연히 좋은 뜻으로 쓰였던 인간다움보다는, 잘 갖춰진 무기가 되는 비인간성이 현대 사회에서 더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다움이
이 세상에 필요한 이유"
그런데도 네온비, 캐러멜 작가는 이 지구상에 인간다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시즌 1의 막바지에 가장 인간적인 '고순무'의 영혼은 가장 비인간적인 골드그룹 회장 '김중규'의 몸으로 들어갔습니다. 인간적인 것이 좋은 것이라면서 왜 비인간적일수록 높은 등급이 되기 쉬운지에 대한 질문에는 여전히 대답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송아리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이 아직 굴러가는 이유는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즌 2에서는 인간다운 고순무에 의해서 더 좋게 바뀔 골드그룹을 기대해 봅니다.
2019 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작 : 신인 부문 우수상 자유 평론 글 조아라
'상상발전소 >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집에 곰이 이사 온다면? 어른을 위한 상상 친구 곰토토 <우리집에 곰이 이사왔다> (0) | 2020.04.14 |
---|---|
"사랑이 밥먹여 주나요?"나를 위한 사랑 <유미의 세포들> (0) | 2020.04.08 |
<오늘의 순정망화> 로 보는 ‘순정만화’라는 레토릭 (0) | 2020.03.31 |
웹툰과는 다르다! 미국 디지털 코믹스 동향 (0) | 2020.03.27 |
장르 전형의 빈틈을 노리는 초 장르적 침투성에 관하여 <좀비딸> (0) | 2020.03.23 |
당신의 최애 캐릭터는 무엇인가요? 2019 캐릭터 이용자 실태조사(2) (0) | 2020.03.20 |
<아기 낳는 만화> 위 사항에 동의하시겠습니까? (0) | 2020.03.18 |
당신의 최애 캐릭터는 무엇인가요? 2019 캐릭터 이용자 실태조사 (0) | 2020.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