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콘텐츠진흥원은 ‘대한민국 콘텐츠산업 2018년 결산과 2019년 전망 세미나’에서 주요 결산 키워드로 ‘여성시대’를 꼽았습니다. 능동적인 여성상을 그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전원 여성 멤버로 구성된 예능 ‘밥블레스유’, 여성향 게임 ‘월간아이돌’ 등 대중문화 전반에 여성 중심 콘텐츠의 약진이 두드러졌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올해도 지속됐습니다. ‘벌새’와 ‘신입사관 구해령’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 모두 여성 서사가 강세였습니다. 예능에서도 셀럽파이브를 필두로 여성파워가 주목받았는데요. 오랫동안 ‘기울어진 운동장’이던 대중문화계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습니다.
대중문화계의 성불평등 문제는 이미 유구한 이슈이나 2010년대 들어 문제가 더 심화됐습니다. 한 예로 2015년 8월 21일 자 중앙일보에는 ‘남초예능 시대’라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글은 “TV 예능에서 여자들이 사라졌다”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무한도전’을 비롯한 남성 중심 버라이어티의 인기가 굳건한 상황에서, 육아와 요리 같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몫이라 여겨졌던 영역마저 남성 예능의 소재가 되면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일밤-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같은 아빠 예능, ‘집밥 백선생’, ‘냉장고를 부탁해’ 등 남성 쿡방이 유행하는 동안 여성 예능인들은 설 자리를 잃어갔습니다.
■ 남초 시대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
영화는 더 심각했습니다. 2016년 9월 웹진 아이즈에 실린 ‘한국영화 남초 시대’ 칼럼은 2010년대 들어 영화에서 성비 불균형이 심화된 현상을 지적합니다. 제작비가 상승하면서 유명 남자배우들을 집단 캐스팅한 대작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려는 전략이 쏠림 현상을 부채질했다는 분석인데요. 이 시기 극장가를 휩쓴 ‘부당거래’,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신세계’, ‘베테랑’, ‘내부자들’ 같은 작품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영화들이 투톱 주연을 기본으로 조연들까지 남성 배우로 채우는 동안, 여성 배우들은 주인공의 아내나 조력자, 조직의 홍일점 역할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드라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꽃보다 남자’가 성공을 거둔 다음해인 2010년부터 ‘성균관 스캔들’, ‘신사의 품격’, ‘상속자들’ 등 꽃미남 캐릭터가 집단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유행하면서 여성 배우들의 입지가 크게 좁아졌습니다. 이 시기에 급부상한 장르물에도 유사한 인물 구도가 적용됐습니다. ‘브레인’, ‘골든타임’, ‘굿닥터’ 등 메디컬 드라마는 젊은 남주인공과 중년 남성 캐릭터의 사제관계와 남성간 권력 다툼에 큰 비중을 할애합니다. ‘추적자’, ‘유령’, ‘나쁜 녀석들’ 등 범죄 스릴러도 남주인공과 남성 악역의 대결 구도로 흘러갔습니다. 여성 캐릭터는 이러한 주요 갈등 구도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이미 페미니즘이 글로벌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2014년 9월 20일 배우 엠마 왓슨의 연설로 그 시작을 알린 UN 성평등 캠페인 히포시(HeForShe)와 세계적 명사들의 페미니스트 선언, 할리우드의 ‘젠더 스와프’ 유행 등이 대표적인 사례인데요. 국내에서도 2015년 상반기 SNS를 뜨겁게 달군 페미니스트 해시태그 운동을 비롯해 온라인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함께 대중문화계의 성불평등을 비판하고, 여성 서사를 열망하는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높아졌습니다. 특히 2015년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가부장제 전복 메시지와 강인한 여성 캐릭터 퓨리오사를 통해 열광을 이끌어냈습니다. 남초 예능에서 가부장제를 패러디한 가모장 캐릭터로 고군분투하는 김숙에게 ‘퓨리오숙’이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KBS에서는 김숙을 주축으로 한 여성 예능 ‘언니들의 슬램덩크’를 방영하며, 여성들의 목소리를 일부 수용합니다. KBS ‘하이파이브’ 이후 지상파에서 무려 8년 만에 등장한 정규 여성 버라이어티였습니다.
■ 아가씨와 굿와이프의 뜨거운 사이다
여성 서사를 향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시기는 2016년부터입니다.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있는데요. 2019년 10월, 여성신문이 창간 31주년을 맞아 2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페미니스트가 된 계기’ 1위로 꼽힌 강남역 살인사건입니다. 2016년 5월 17일 서울 중심가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여성들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자발적인 추모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페미니즘과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여성의 마음을 대변하고 용기를 북돋아 줄 콘텐츠가 더 많아져야 한다는 공감대도 확산됩니다.
이 가운데 6월에 잇달아 개봉한 영화 ‘아가씨’, ‘비밀은 없다’, ‘우리들’은 신선한 여성 재현으로 지지를 받았습니다. 남성성의 허위를 조롱하고 폭력적 세계의 탈주에 성공한 ‘아가씨’의 히데코(김민희)와 숙희(김태리), 정치인의 순종하는 아내에서 복수의 주체로 변신한 ‘비밀은 없다’의 연홍(손예진), 소녀들의 복잡하고 섬세한 관계를 보여준 ‘우리들’의 선(최수인), 지아(설혜인), 보라(이서연)는 한국영화 속 여성의 역할을 다양화했습니다. 이 흐름은 2017년 ‘아이 캔 스피크’와 ‘땐뽀걸즈’에서도 이어집니다. 위안부의 고통을 증언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성폭력을 고발한 옥분(나문희), 춤과 우정을 통해 성장하는 ‘땐뽀반’ 소녀들은 기존의 한국영화가 크게 주목하지 않은 여성 노년, 청소년들의 힘과 활기를 보여줍니다. 예능에서도 여성들의 목소리에 응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눈길을 끈 것은 2017년 나란히 등장한 토크쇼 ‘뜨거운 사이다’와 ‘까칠남녀’입니다. 정치와 사회,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젠더 이슈를 놓고 토론을 벌이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두 프로그램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새로운 여성 콘텐츠에 대한 갈망을 재확인시켜줬습니다. ‘여성 건강 리얼리티 쇼’를 표방하며 여성의 몸을 둘러싼 터부에 의문을 제기한 ‘바디액츄얼리’ 역시 많은 의미를 남긴 프로그램입니다.
드라마에서도 여성들의 이야기가 활기를 띠었습니다. 미국의 여성주의적 원작을 리메이크한 ‘굿와이프’, 청년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청춘시대’, 개성적인 노년 여성들의 삶과 우정을 그린 ‘디어 마이 프렌즈’, 여성 슈퍼히어로물 ‘힘쎈여자 도봉순’ 등 다양한 여성 서사가, 2016년과 2017년 두 해 동안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시기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은 ‘마녀의 법정’입니다. 여성 아동범죄 전담부 검사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성폭력 문제를 정면에서 다룹니다. 그간 남성 배우가 도맡았던 출세 지향적 검사 마이듬(정려원)의 묘사는 단연 돋보이는 성과였습니다.
■ 82년생 김지영의 허스토리
2018년과 올해는 여성 서사가 더욱 확대된 시기입니다.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 고발로 시작된 미투 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할리우드 여성 스타들에 의해 대중화된 이 반성폭력 운동은 서 검사의 증언 이후 국내에서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미투 운동이 여성들에게 가져온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여성 서사를 향한 열망을 넘어 남성 중심 문화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여성들에게 폭넓은 연대의 응원을 보내게 됐다는 점입니다. 여성주의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뿐 아니라, 주제를 떠나 여성들이 주도하고 만드는 다양한 콘텐츠를 응원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영화에서도 여성 서사가 점점 확대됐습니다. 대표 사례가 여성들의 진입이 가장 어려웠던 중간 규모 이상 상업 영화의 변화입니다. 남성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대작 시대극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리더를 앞에 세운 ‘국가부도의 날’, 역시 남성들의 전유물이던 버디 수사물 장르에 여성 형사 투톱 주연작 ‘걸캅스’가 흔치 않은 성공 사례를 남겼습니다. ‘82년생 김지영’도 본격적인 페미니즘 메시지를 내세우는 동시에 가족영화로서 폭넓은 관객층의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저예산 영화에서는 여성 서사의 다양화가 더 두드러집니다. 여성의 자립과 노동을 다룬 ‘리틀 포레스트’, 학대당하는 소녀와 구원자 여성의 연대를 그린 ‘미쓰백’, 도시 빈민 청년 여성의 삶을 그린 ‘소공녀’, 위안부 할머니들의 뜨거운 투쟁의 기록 ‘허스토리’, 유관순 열사와 여성 항일 운동가들의 숨은 역사를 기록한 ‘항거’, 1990년대 회고 열풍을 여성의 경험으로 다시 읽게 한 ‘벌새’ 등 주목할만한 작품이 잇달아 개봉했습니다. ‘허스토리’, ‘항거’를 제외하고 모두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라는 점도 귀중한 성과입니다.
드라마에서도 남성들이 주도해왔던 장르물에 변화가 일어나며 여성 서사의 지평이 확대됐습니다. 먼저 남성 역사 위주였던 사극 장르에 새 경향이 생겼는데요. ‘미스터 션샤인’ 과 ‘이몽’은 항일운동사에서 지워져 있던 여성 독립투사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신입사관 구해령’은 여성 사관들이 존재했다는 대체 역사를 통해 전복적인 조선 사대부 여성 캐릭터를 그려냈습다.
사극과 함께 대표적인 남성 중심 장르인 스릴러 변화도 눈에 띕니다. 아동 학대 문제를 다룬 범죄 스릴러 ‘마더’와 ‘붉은 달 푸른 해’는 여성의 눈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를 응시했습니다. 입시 문제와 가부장제의 모순을 연결시킨 스릴러 ‘시크릿 마더’와 ‘SKY 캐슬’은 중년 기혼 여성 서사의 진화를 보여준 작품입니다. 느와르의 문법을 여성들의 이야기에 도입한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도 화제였습니다. 이 작품은 애초에 유리천장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성공을 향해 질주하고 경쟁하는 여성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예능에서도 여성파워가 더 성장하고 있습니다. 여성들과의 공감대를 내세운 예능 ‘밥블레스유’, ‘비밀언니’, ‘센마이웨이’ 등이 차례로 등장하는가 하면, 제작자로 변신한 송은이의 도전도 주목받았습니다. 그가 선보인 웹예능 ‘판벌려’의 셀럽파이브 프로젝트는 남성 중심 예능판을 뒤흔드는 대성공을 거뒀는데요. 넷플릭스 스탠드업 코미디 ‘박나래의 농염주의보’도 여성의 성적 욕망과 경험을 거리낌 없이 고백하며 여성 예능의 장르와 소재를 넓혔습니다. 15년 만에 완전체로 모인 핑클의 ‘캠핑클럽’과 염정아, 윤세아, 박소담의 ‘삼시세끼 산촌편’은 남성들이 독점한 야외 예능에서 여성들만의 조화롭고 성실한 이야기의 매력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오디션 예능 ‘퀸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섹시나 청순의 아이콘으로만 소비되던 걸그룹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무대를 기획하면서, 전형적인 이미지를 전복하는 모습으로 큰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 진정한 다양성의 시대를 향해
여성 서사를 비롯한 콘텐츠의 다양화는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디즈니와 넷플릭스 같이 글로벌 콘텐츠산업을 선도하는 기업들은 이미 젠더와 인종을 아우르는 다양성의 전략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이 강했던 디즈니의 진화가 이목을 끕니다. 2010년대 이후 ‘메리다와 마법의 숲’, ‘겨울왕국’, ‘모아나’ 등 기존의 공주 이야기를 전복시킨 작품을 꾸준히 내놓고 있는데요. ‘미녀와 야수’, ‘알라딘’ 등 실사 영화화 프로젝트에서도 진보한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습니다. 최근 ‘인어공주’ 실사화 과정에서 흑인 여성 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것은 이 같은 전략의 정점입니다.
디즈니는 마블을 인수하면서 남성 영웅 대서사시인 슈퍼히어로 장르에서도 여성 서사 강화와 다양성 전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최초의 여성 단독 히어로 영화 ‘캡틴 마블’을 공개했고, 내년에도 여성 히어로 솔로 영화 ‘블랙 위도우’를 통해 여성 서사의 지평을 넓힐 전망입니다. K드라마, K팝에 이어 글로벌 시장에서 점점 주목받고 있는 K콘텐츠가 어떤 방향성을 띠어야 하는지는 명백합니다. 진정한 다양성의 시대를 향해 가야 합니다.
글 김선영 대중문화 평론가
이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 정기간행물 "N콘텐츠 14호"에 게재된 글을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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