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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미술관을 걷는 이곳의 나

by KOCCA 2019. 2. 20.


4차 산업혁명의 주요 기술 혹은 범용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y)과의 접목이 예술에서도 활발하다. 이러한 융합 현상은 소위 ‘뉴미디어아트’로 통칭되는 시각예술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사물인터넷, 생명공학, 증강현실, 가상현실, 3D프린팅, 홀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은 날로 다양해지는 추세다. 


우선 사물인터넷(IoT) 예술은 센서를 통해 사물의 움직임이나 사람의 활동 내지 생각을 포착해 작품화하는 예술이다. 지구촌의 날씨를 표현하는 설치 작품인 미국 산호세 공항의 <이클라우드(eCLOUD)>, 미니애폴리스 시민들이 트위터에 작성한 글들을 분석하여 추출한 감정 상태를 거대한 LED조명으로 표현하는 프로젝트인 <미미(MIMMI)>, 베를린 시민들의 얼굴을 카메라로 관측하여 실시간 감정 데이터의 평균값을 이모티콘(smiley)으로 표현하는 <기분을 보여주는 가스탱크(Stimmungsgasometer)> 등이 대표적이다. 


헤더 듀이해그보그(HeatherDewey-Hagborg)의 <스트레인저 비전스(StrangerVisions)


다음으로, 1936년에 열린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스타이컨 참제비고깔>전을 효시로 하는 바이오아트는 생명공학기술과 예술적인 상상력이 결합된 장르이다. 주로 살아있는 생명체를 생체 실험과 유사한 방식으로 창작한다. 다루는 생명공학의 분야에 따라 DNA를 활용 또는 변형하는 작품, 조직공학 예술, 신체 혹은 생명 자체를 다룬 작품 등으로 분류되며 기술적 보철(사이보그) 예술을 포함하기도 한다. 길거리에 있는 머리카락이나 담배꽁초 등의 DNA를 분석해 사용자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헤더 듀이해그보그(Heather DeweyHagborg)의 <스트레인저 비전스(St ranger Visions)>, 발광 해파리의 유전자를 주입해 알비노 토끼로 만든 카츠(Eduardo Kac)의 <GFP 버니(GFP Bunny)>, 말의 혈장을 자기 몸에 수혈한 후 자신의 신경계와 내분비계가 변화를 일으키는 퍼포먼스로 주목을 받은 장테트(Marion LavalJeantet)의 <말이 내 안에 살기를>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또한, 증강현실(AR)을 이용한 예술은 실제 세계에 3차원 가상객체를 혼합하여 실제 세계와 가상세계의 실시간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아무 것도 없는 하얀색 전시대에 스마트폰이나 패드를 대면 금송아지가 나타나는 제프리 쇼(Jeffrey Shaw)의 <금송아지>가 대표적이다. 또한 스페인 출신 미디어 아티스트 파블로 발부에나(Pablo Valbuena)의 <증강된 조각(Augmented Sculpture series)>은 우리나라에도 여러 번 전시되었다. 가상현실 예술로는 최근 구글의 틸트 브러시를 활용한 퍼포먼스가 각광을 받고 있다.


패트릭 트레셋(Patrick Tresset)의 ‘바울(Paul)’


하지만 무엇보다 예술과 4차 산업혁명 기술의 접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심사는 인공지능 예술이다. 과연 인공지능은 사람과 같은 창의력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래서 마침내 예술가의 입지를 흔들고야 말 것인가?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와 유사한 화풍의 그림을 그려낸 ‘넥스트 렘브란트’ 프로젝트나 ‘바울과 e다윗’을 비롯해 수없이 등장하는 드로잉 로봇들을 볼때마다 인공지능 예술가의 등장에 대해 찬반양론을 펼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다분히 공급자적 관점이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과 사람이 만든 예술의 구별은 갈수록 의미가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뉴미디어 이론가 로이 에스콧(Roy Ascott)의 말대로, 수요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비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퍼뜨리고 꿀을 얻듯 인공지능의 예술과 인간의 예술 사이를 오가면 그만이다. 물론 두 예술 사이에서 마르셀뒤샹의 이른바 엥프라멘스(Inframince, 미세한 차이)를 구별해 내는 능력의 보유 여부는 여전히 숙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과거에도 기술과의 융합을 시도한 예술은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일시적으로 호기심과 경이감에 호소하다가 사라지곤 했다. 기술과 속도를 숭배했던 미래파 예술이 대표적이다. 현재 선보이는 여러 기술융합예술 또한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 할 수 있다는 회의론이 많다. 물과 기름처럼 기술과 예술이 제대로 융합되지 않은 채 기술 이벤트를 보는 건지 예술작품을 보는 건지 헷갈리게 만드는 작품 등, 어설픈 접목으로 인해 작품의 수준만 떨어뜨리는 사례들도 흔하다. 물론 이러한 작품들은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도태되든지 아니면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근대 이후 대중들로부터 소외를 경험하고 있는 예술이 첨단기술과의 융합으로 인해 다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산호세 공항의 설치미술작품 <이클라우드(eCLOUD)>


산업혁명 이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문화예술 또한 성장할 것이라 기대감이 높았다. 많은 이들이 노동시간의 감소로 늘어난 여가시간을 문화예술로 채울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예술들 즉 순수, 기초 혹은 고급예술로 불리는 예술들의 상황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예전의 화려했던 시절을 그리워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장르들이 더 많다. 왜 그럴까. 혹자는 K-POP 등 대중문화와의 자원경쟁에서 패배하기 때문이라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술가 혹은 예술단체의 공급자 위주의 생산방식을 지적하기도 한다. 근대 이후 생겨난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의 구호는 예술가로 하여금 소비자를 예전보다 훨씬 덜 의식하게 만들었다. 소비자를 의식하지 않는 예술이 소비자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시각예술이 현대사회에서 소외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시간의 소비에 있다. 바쁜 일상을 살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시간은 그 무엇보다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트렌드 분석가 페이스 팝콘(Faith Popcorn)은 모든 것을 하길 원하는 현대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바로 시간절약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국립예술기금(NEA)의 최근 조사결과에서도 예술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장애요인으로 경제적 여유(38%)를 제치고 시간 소모(47%)가 첫 번째로 꼽혔다. 미술관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관람객의 평균 체류 시간은 1시간을 넘지 않는다. 각각의 전시물을 관람하는 시간은 불과 9.3초라는 연구결과도 있지만 어쨌든 30초 미만이다. 그러나 미술관에 한 번 방문하려면 왕복 시간까지 감안하여 최소 2~3시간 이상을 소비해야 한다.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화랑을 들를 때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다리와 발의 통증(museum leg syndrom)을 비롯해 오랜 시간 감상에서 오는 인지적 피로감 등, 소위 ‘미술관 피로(museum fatigue)’를 감수해야 한다. 관람빈도가 낮은 관람객들일수록 미술관과 화랑은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는 가상현실을 비롯한 기술의 발전에 따른 원격현전(telepresence)의 구현을 통해 이러한 장벽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VR 미술관과 구글의 아트 팔레트 등이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르파블로 발부에나(Pablo Valbuena)의 <증강된 조각(Augmented Sculpture series)>

‘넥스트 렘브란트’ 프로젝트로 그려진 렘브란트 화풍의 그림


물론, 원격현전에 의한 예술이 단지 소비자의 편리성 추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원격현전은 거리의 제약을 넘어 관람객의 능동적 참여와 예술가와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낸다. 에스콧은 이를 텔레프레즌스 아트(Telepresence Art)라고 불렀다. 컴퓨터와 통신망 기술을 이용하여 창조적인 참가의장을 지구상에 확장하고자 하는 새로운 의식, 이른바 ‘지구 의식(global consciousness)’의 개척을 도모하는 예술표현을 일컫는다. 소비자에게 편리를 제공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의 예술이 소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주목해야 한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의 미술관을 걷는 이곳의 관람객’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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