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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해 순위는 울리나, 순위제 음악 방송의 역할과 방향성

by KOCCA 2019. 2. 18.


일주일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방송사마다 음악 방송을 쏟아 낸다.

시청률이 저조할 뿐 아니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순위를 집계함으로써

공정성을 의심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순위제 음악 방송.

K-POP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지금, 순위제 음악 방송의 역할과 방향성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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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현존하는 순위제 음악 방송 숫자로만 보자면 대한민국은 분명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중음악 강국이다. 농담이 아니다. 꽉 채운 일주일, 7일 동안 서울 곳곳에서는 매일같이 생방송 음악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화요일은 SBS MTV <더 쇼>, 수요일은 MBC MUSIC <쇼! 챔피언>, 목요일은 Mnet의 <엠카운트다운>, 금요일은 KBS <뮤직뱅크>, 토요일은 MBC <쇼! 음악중심>, 일요일은 SBS <SBS 인기가요>가 전파를 탄다. 유일하게 비어 있는 월요일은 아리랑 TV의 <Simply K-Pop> 녹화가 진행된다. 방송 요일은 금요일이지만 출연진을 섭외하려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공중파 프로그램과 스케줄이 겹치지 않아야 하니 달리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순위제 음악 방송이 이렇게까지 많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욱 놀라운 건 이 모든 프로그램이 각자의 방식으로 순위를 집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녹화로 진행되는 <Simply K-Pop>을 제외하면 모든 프로그램이 각자의 순위를 각자의 방식으로 집계해 발표하고 그에 따라 1위에게 상을 수여한다. 점수는 음원과 음반 판매 점수를 기본으로 제작진의 취향에 따라 시청자 선호도, 방송 횟수, 문자투표 등을 더해 구성된다. 한국에서 딱 일주일만 보내면 총 6개의 다른 듯 닮은 음악 방송 차트를 만날 수 있는 셈이다.


초점은 당연하게도 차트의 공정성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마치 연례행사처럼 반복된 음악 방송 순위 집계 방식에 대한 공정성 논란은 음악 방송과 차트에 대한 신뢰를 단계적으로 무너뜨렸다. 2000년대 이후 지상파 음악 방송들이 악화된 여론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혹에 순위제 폐지와 부활을 지난하게 반복하는 동안 음악 방송 제작이 가능한 채널은 더욱 늘어났고 음악 방송 차트가 갖는 권위는 그만큼 희미해졌다.


경쟁자가 늘어난 만큼 각 채널은 인기 가수를 먼저 섭외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결국 차트 공정성은 커녕 방송 출연 유무가 1위 수상과 직결되는 웃지 못할 현실이 반복되었다.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방송사와의 껄끄러운 파워게임 끝에 자사 채널에 출연하지 않게 된 특정 기획사 소속 가수에게 높은 점수가 돌아가지 않도록 집계 방식을 수정한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았다. 세간에 떠도는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며 충분히 반박할만한 객관적 근거도 없었다. 1위 한 번이 간절한 아이돌 팬덤의 비난 수위는 높아졌고 시청률은 그에 반비례하듯이 소수점을 향해 한없이 낮아져 갔다. 방송은 결국 각 채널의 재방송 시간대인 주말 오후 3~5시대에 고정 편성되었다. 가장 뜨겁지만 누구도 원하지 않는 감자. 순위제 음악 방송은 어쩌다 이런 존재가 되었나.



이쯤 되면 순위제 음악 방송의 제작과 송출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방송사는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다고, 팬들은 공정하지 않다고, 대중은 아이돌 가수만 나온다고 외면하고 있는 음악 방송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까지 박복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가.


시청률과 여론 모든 면에서 초라한 성적표를 보여주고 있는 지금 순위제 음악 방송의 밑바탕엔 무엇보다 급격하게 변화한 시대상황이 있었다. 종영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을 대표하는 순위제 음악 방송으로 회자되는 KBS <가요톱10>을 회상해 보자.


이미지 출처 : KBS <뮤직뱅크>


프로그램이 방송된 1981년에서 1998년까지는 인터넷은 물론 케이블이나 위성 방송도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도 공신력 있는 차트의 존재는 요원했고,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가요가 차지하는 비중도 지금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우리말로 된 음악들이 얼마나 인기를 끌고 있는지, 그들의 순위가 어떻게 되는지는 인류보편적인 관심사였고 해당 방송사가 갖고 있는 지역별, 연령별로 무작위 추출한 전국 투표인단의 존재도 순위를 가려내는 데 있어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대중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요톱10>의 종영이 1998년이라는 건 무척 상징적이다. 눈부신 속도로 발달한 인터넷과 각종 시스템 덕에 21세기 들어 음반 판매량은 시간 단위로 업데이트되기 시작했고, 어느새 ‘대세’와 동일한 이름이 되어 버린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의 실시간 차트는 시간도 모자라 5분 단위 차트까지 만들어 냈다. 음악을 즐기는 이들의 자세도 변화했다. 소비자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특정 가수를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팬덤’이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에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자리했다. 전자는 음악 방송 순위에 한없이 민감했고 후자는 시대에 유연히 대응하지 못한 음악 방송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이미지 출처 : 멜론 실시간 음원 차트


이렇듯 마지막 남은 권위마저 위태로워진 순위제 음악 방송을 그래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방송사들에게도 물론 이유는 있다. 다름 아닌 음악 방송 출연권을 통해 붙잡은 인기 아이돌과 기획사와의 밀접한 교류 그리고 은밀한 거래다. 방송프로그램의 입장에서는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건 물론 연기도, 진행도, 예능도 할 줄 아는 전도유망한 젊은 스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시청률과 화제성의 보증 수표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자사 음악 방송에 출연시킨다는 건 팬들을 대상으로 한 실시간 문자 투표 시스템을 통해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당 가수와 드라마, 예능 등 방송사가 보유한 다른 형태의 프로그램 출연 협상시 방송사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도 드러내 말하지 않지만 업계에서는 이미 공공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러한 비밀스런 거래는 그대로 방송사가 그 어떤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음악 방송 제작을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새 노래를 낸 가수에게는 무대가 필요하다. 특히 국내는 물론 해외 팬들에게도 실시간으로 무대를 선보여 최대한 많은 팬을 확보해야 하는 최근 아이돌 그룹의 경우는 무대 하나하나가 더욱 절박하다. 이러한 상황이 몇 년 반복되는 사이 출연진은 대부분 예능이나 다른 프로그램에 섭외가 가능한 인기 아이돌로 채워졌다. 비슷한 처지의 가수들이 음악 방송 무대 위에서 복작거리는 사이 역시 비슷한 체급끼리 경쟁해야 하는 팬덤은 몇 배로 피곤해졌고 이 경쟁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 방송이 그 방송 같다며 채널을 돌렸다. 철저하게 주객이 전도된 상황, 순위제 음악 방송은 누구를 위한 방송도, 무엇을 위한 방송도 아닌 채 지금을 맞이했다.



이미지 출처 : KBS <뮤직뱅크>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어진 순위제 음악 방송들은 안타깝게도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드는 선택만을 이어가고 있다. 음악 방송을 향한 대중의 관심도를 회복할만한 새로운 콘텐츠 개발은 여전히 외면한 채, 지금도 충분히 볼모로 잡혀 있는 아이돌 팬덤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기획이 가리키고 있는 대부분의 화살표가 쏠려 있는 실정이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변별력 없는 라인업은 그대로, 출근길이나 퇴근길은 물론 대기실까지 습격해 가수가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영역에 카메라를 들이밀어 사진을 찍고 자투리 영상을 만들어 내는 형태가 가장 흔했다. 3분~4분의 무대를 위해 아침 일찍 ‘출근’하는 가수를 보기 위해 새벽같이 기자들을 모았고 팬들은 더 이른 시간부터 줄을 섰다. 반복되는 불필요한 상황으로 쌓인 피로는 수시로 음악 방송의 존립 명분과 순위 집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향해 분노의 방향을 틀었다. 여론은 다시 나빠질 것이고, 순위제는 또다시 폐지될 것이며, 다시 부활할 것이다.


이러한 무의미한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어쩌면 꽤 단순할지도 모른다. 객관적인 지표만을 활용한 설득력 있는 순위 집계 방식, 무대미술에서 카메라 워크까지 합이 잘 맞는 완성도 높은 무대연출, 타 프로그램과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있는 개성 있는 라인업, 한국 대중음악 지형도와 발전에 대한 작은, 아주 작은 관심.


사실 이러한 방송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프라는 이미 넘칠 만큼 갖춰져 있다. 비록 파행적으로 운영되어 오기는 했지만 케이팝의 발전과 함께 빠르게 성장, 발전해 온 수준 높은 방송 인프라를 바탕으로 각자의 강점과 개성에 집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채롭고 흥미로운 음악 방송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좋은 날이 올 때쯤이면 어쩌면 순위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한 화젯거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겐 아직 만회할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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