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음악 페스티벌의 이름엔 언제나 ‘록’이 붙었다. 록음악을 하는 팀만 출연하는 것은 아니지만, 버릇처럼 그랬다. 국내 팀들이 인지도와 연차 순으로 오후 시간 타임 테이블을 채우면 메인 시간대인 저녁과 밤에는 페스티벌의 흥행과도 직결되는 명망 높은 해외 팀들의 이름이 들어섰다. 시기는 늘 여름이었다. 대부분의 라인업 섭외가 이웃나라 일본 음악 페스티벌과 관계가 있는 탓에 한여름 밖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이유가 자리하고 있지만, 환경이 극단적일수록 관객들의 유대감은 짙어졌다.
그렇게 영원히 애증의 관계를 이어갈 것 같던 한국 음악 페스티벌과 관객들의 관계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7년 본격적인 균열이 감지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 음악 페스티벌 두 곳이 모두 예년만 못한 관객을 동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에 비해 천 명 정도의 관객 감소량을 보인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그래도 나름 선전한 셈이었다. ‘지산 밸리록 뮤직앤드아츠 페스티벌’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사실 이런 얘기가 아주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2012년 한국 공연업계의 오랜 염원 가운데 하나였던 ‘라디오헤드’ 내한을 성공시키며 국내 음악 페스티벌 최초로 10만 관객을 달성한 뒤 좀처럼 다시 그 숫자를 회복하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협력사와의 갈등으로 인한 장소 변경, 국가적 사고로 인한 갑작스런 개최 중단 등 갖은 악재를 견디며 겨우 생명을 이어오던 페스티벌이 2017년 받아든 성적표는 3일 총 7만 관객이라는 숫자였다. 누구도 입밖으로 소리 내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한국 음악 페스티벌 시장의 한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을.
변화는 작지만 분명히 시작됐다. 가장 선명한 신호는 ‘소멸’이었다. 하루에 관객 수 만 명을 동원했던 대형 음악 페스티벌들이 소리소문 없이 하나둘 모습을 감췄다. ‘현대카드 씨티브레이크’는 2년, ‘지산 월드 록 페스티벌’은 1년이 고작이었다. 다른 사정도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페스티벌들은 뻔한 섭외 가능 리스트 안에서 음악가 몸값만 올리며 내한 시장을 과열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협력사 사이의 이권다툼으로 멀쩡한 페스티벌이 둘로 나뉘는 등 소위 ‘밥그릇 싸움’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소식들도 이어졌다. 그렇게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들끼기 엎치락뒤치락 하는 사이, 전에 없던 색다른 소식들이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음악 페스티벌은 당연히 적자를 보는 사업이고, 록은 원래 배고픈 음악이라는 이야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되는’ 페스티벌들의 이름이 하나둘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반가운 소식을 전한 건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GMF)’ 이었다. 2007년 처음으로 문을 연 이 페스티벌은 여러모로 신기한 구석이 많았다. 페스티벌 하면 연상되는 계절, 여름을 과감히 버리고, 10월 말 선선한 가을을 개최시기로 잡았다. 공연장소도 색달랐다. 작은 실내체육관에서 분위기 있는 수변 무대까지, 서울에 위치한 올림픽공원의 이곳저곳을 공연장으로 삼았다. 넓은 부지와 큰 음량으로 발생되는 소음 민원을 피해 지방이나 서울 근교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기존 페스티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도시’ 혹은 ‘도시인’ 친화적인 선택이었다.
라인업도 사뭇 달랐다. 유명한 해외 음악가를 먼저 섭외하고 한국 음악가를 사이사이 채우는 일방적인 방식이 아닌, 높은 인기의 한국 음악가를 우선 섭외하고 배치하는 운영의 묘를 보엿다. 해외에서 섭외된 팀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의 색깔에 어울리는 음악을 하는 음악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존 페스티벌의 상식을 파괴한 GMF의 파격은 금세 결실을 거뒀다. 한국 음악 페스티벌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만 같던 바로 그 목표, 흑자 경영을 5년이라는 단기간 안에 이뤄낸 것이다. 주최측인 해피로봇은 개최 5년차였던 2012년부터 금전적으로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해졌고, 초대권 없이도 페스티벌 입장권을 매진시키게 됐다고 발표했다.
이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키워드는 ‘도심형’과 ‘취향’이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음악과 함께 하는 여가를 위해 일상의 일부를 기꺼이 할애할 준비가 된 이들이 바라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이동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에서 열리는, 자신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음악들로 가득찬 페스티벌, 이는 특히 2030 세대, 페스티벌을 비롯한 각종 문화 콘텐츠를 가장 활발하게 소비하고 있는 C제너레이션의 욕구에 딱 들어맞았다.
시대와 호응한 기존의 한국 음악 페스티벌들이 고된 체질 변화를 겪어내는 동안, 한 켠에서는 소리소문 없이 성장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DJ와 전자음악을 기반으로 한, 속칭 ‘EDM 페스티벌’이다. 2007년 서울시 주최 축제의 일환으로 개최되며 한국 최초의 EDM 페스티벌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 ‘월드 DJ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울트라 코리아’, ‘5tardium’ 등 해외 라이선스를 기반으로 한 브랜드 EDM 페스티벌들이 속속 등장을 알렸다. ‘센세이션’, ‘SEMF’처럼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름들과 2017년 첫 개최를 알린 ‘유나이트 위드 투모로우랜드 코리아’까지 합하면 1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젊은 세대들에게 가장 뜨거운 이끈 장르 음악 페스티벌이었다. 서울 곳곳에 위치한 대형 스타디움을 중심으로 개최되며 무대 위 음악가의 플레이보다 ‘그 음악에 맞춰 춤추는 나’에 더 초점을 맞춘 해당 페스티벌들은 예술 그 자체보다 그것을 좋아하고 즐기는 ‘나’에 방점이 맞춰진 새로운 세대들의 문화 콘텐츠 소비 방식과 그림처럼 어울린다. 결국 2016년 울트라 뮤직 페스티벌(UMF)이 3일간 15만 명이라는 국내 단일 페스티벌 사상 역대 최다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음악 페스티벌 역사의 새 페이지를 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음반을 사지 않고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들으며, 산 넘고 물 건너 고생해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자신의 방에 편안히 누워 지구 반대편에서 열리고 있는 음악 페스티벌을 유튜브 생중계로 볼 수 있게 된다. 페스티벌의 흥행을 점치는 건 여전히 신의 영역에 가까운 일이지만, 시대를, 세대를 꾸준히 읽는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새로운 문화소비 세대의 민심을 읽을 수 있는 바로미터로 이만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글 김윤하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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