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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방송 영화

역사 속 인물, 새롭게 태어나다 컬처링 1주년 기념 <역발상 토크콘서트>

by KOCCA 2016. 7. 21.


 

학창 시절, 저는 유난히 역사 과목에 강했습니다. 국어나 수학, 영어 교과 성적은 널뛰기 일쑤였지만, 유난히 역사 교과만큼은 내신 성적도, 모의고사 성적도 안정적이었어요. 몇몇 친구들은 저에게 그 공부 비법을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난처하던 기억이 납니다. 왜 역사가 재미있는지, 왜 역사만큼은 한 번 들은 내용이 잊히지 않는지, 저로서도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저 역시도 가끔은 그 비결이 궁금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했던 역사콘텐츠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님이 사극을 좋아하셨던 덕분에 매주 주말이면 <태조 왕건>을 시청했고,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만화책과 소설책을 즐겨 읽고, 그러면서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관계가 자연스럽게 제 머릿속에 들어왔던 것 아닐까요.


이렇듯 역사콘텐츠에 관심이 많은 저에게, <역발상(역사에서 발견하는 상상) 토크콘서트> 개최 소식은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역발상 토크콘서트>는 역사 민속 고전 등 유관기관들이 개별적으로 제공하던 자료를 하나의 데이터베이스로 통합하여 제공하는 "컬처링(www.culturing.kr)" 서비스 오픈 1주년을 기념해 기획되었다고 하는데요. 맥스무비 박혜은 편집장님, 영화 <사도>·<동주>의 이준익 감독님,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의 정현민 작가님이 참여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자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평소 즐겨보았던 사극 영화·드라마를 제작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당일 아침부터 설렜는데요. 저와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역발상 토크콘서트> 신청은 조기에 마감되었고, 미처 신청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토크콘서트가 열리는 컨퍼런스룸 밖에는 별도의 스크린과 의자가 마련될 정도였어요. 많은 사람들의 기대감 속에서 열렸던 <역발상 토크콘서트>, 세 분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사진 1. 역사문화포털 "컬처링" 활용 사례 전시

 


Q1. 콘텐츠를 통해서, 역사 속 인물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표현해보고 싶은 역사 속 인물은 어떻게 결정하시나요?


이준익 감독: 사도세자는 비극이기에 조명해보고 싶었습니다. 삶에는 물론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있겠죠. 하지만 그보다는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의 존재감이 훨씬 크다고 생각해요. 관객 자신보다 더 아픈 상처를 가진 인물이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내어, 울림을 주고 싶었습니다.


정현민 작가: <정도전>의 시놉시스 제작 단계에서, 저는 당시 화두였던 '창조'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요. 좀처럼 새로운 아젠다를 끌어내지 못하던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새로운 나라를 구상했던 유학자 정도전을 창조정치의 롤모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아젠다를 끌어내는 창조적인 리더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Q2. 흔히들 역사극은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서 만들어진다'고 표현합니다. 역사극을 제작할 때, 창작자는 어느 정도까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정현민 작가: 징검다리를 생각해보세요. 역사의 주요 팩트를 돌멩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돌멩이와 돌멩이 사이를 잇는 것이 작가의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하드라마에서는, 일반적인 역사적 상식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합니다. 거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더하는 것이죠.


이준익 감독: 결국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추론하고, 상상하는 거예요. 저도 점과 점 사이를 잇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선을 제대로 이었을까,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죠. 제가 선을 잘못 이으면 수많은 관객에게 영향을 미치니까요.

박혜은 편집장: 상상력은 거짓이 아닙니다.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사료들을 뚫고, 직관적으로 본질에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봐야죠. 역사콘텐츠에서의 '상상력'은 조금 다른 의미로 정의되어야 할 것 같아요. 

 

사진 2. 이날 <역발상> 토크콘서트 사회를 맡았던 맥스무비 박혜은 편집장님

 

Q3. 자료를 조사하다 보면 나의 직관이 닿는 진실, 그리고 기록되어 있는 역사가 충돌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이준익 감독: 사실, 고증에 사용되는 사료 자체가 객관적이지 않아요. 누군가의 기록이기에, 작성자의 의지와 주관이 분명 반영됐겠죠. 기록자와 다른 입장을 지닌 당대 사람들이 이 사료를 보면, 현존하는 사료는 모두 엉터리라고 하지 않을까요.


정현민 작가: <정도전>은 비교적 고증에 충실한 드라마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각색과 윤색은 분명 존재해요. 정도전이 사망하는 마지막 장면을 예로 들어볼까요? 작품 내내 정도전을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혁명가로 그렸기에, 정도전의 마지막을 비굴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조선왕조실록에 비추어보면 분명한 왜곡이에요. 하지만 저는 조선왕조실록대신, 삼봉집의 시선을 선택했습니다.


작품을 만들면서 한 인물을 추적하다 보면, 기록 자체를 믿을 수 없는 순간에 이르기도 해요. 거기다가, 특정 사건에 대해서는 학설이 통일되지 않은 경우도 있죠. 조선 초를 다룬 수많은 논문을 읽어봤는데, 요동 정벌에 대한 정도전의 입장이 논문마다 다르더라고요. 특정 학설만 고집하기보다는, 드라마의 흐름에 맞게 그때그때 적당한 시선을 선택했습니다. 작가의 직관을 밀어붙여야 극 전체가 살겠다는 확신이 들면, 저는 그 직관을 따릅니다.

 


Q4. 과거 시대를 다룬 콘텐츠에 수식어를 부여할 때, '사극', 또는 '시대극'이라는 수식어가 붙고는 합니다. 주로 근현대사로 넘어오면 '시대극'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요.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이준익 감독: 아무래도 복장의 차이가 큰 것 같은데요. '전통'이라고 느껴지는 옷차림을 사극의 주요 특징으로 보고, 그에 비해 짧은 머리에 양장을 입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작품은 시대극으로 보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일제강점기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을 '시대극'으로 부르는 것이고요. 하지만 이런 용어 구분은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정현민 작가: 사실, 역사콘텐츠의 정의는 '역사적 사료에서 출발하는 콘텐츠'잖아요. 그러면 역사적 사료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작품은 모두 시대극으로 간주하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해를 품은 달> 같은 드라마를 모두 '시대극'이라는 장르로 분류한다면, 이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서 '픽션'이니 '퓨전사극'이니 이런 용어는 더 이상 만들어낼 필요가 없겠죠. 사료에 기반을 두는 작품은 '사극', 그리고 그 시대에서 벌어질 법한 인물 관계 등을 빌려와서 만드는 이야기는 '시대극'으로 정의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진 3.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의 정현민 작가님

 


Q5. 지금 이 자리에는, 역사콘텐츠 창작을 꿈꾸는 예비창작자들이 많이 참석했는데요. 이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정현민 작가: 사극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에서 벗어나셨으면 좋겠어요. 저 또한 사극은 소수의 훈련된 사람, 또는 많이 배운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작품을 쓰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역사를 잘 몰랐기에, 선을 정해놓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식이나 디테일보다는 진정성으로 작품에 임하세요. 아마 상식과는 다른 인물이 발견될 겁니다.


이준익 감독: 영화냐 드라마냐, 이런 매체적 특성 역시 고려하셔야 합니다. 드라마는 보조작가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아요. 따라서, 마음이 잘 맞고, 이야기가 잘 통하는 파트너가 꼭 필요합니다.


정현민 작가: 드라마를 꿈꾸시는 분들이라면, 저는 대본을 될 수 있는 한 쉽게 쓰라는 조언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드라마와 영화는 시청 환경이 다르거든요. 드라마는 매회 끊임없이 시청자를 TV 앞으로 집중시켜야 하기에, 되도록 접근이 쉬워야 합니다.


이준익 감독: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역사 속 인물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무수히 많아요. , 그 인물을 영화로 끌고 오려면 정확한 역사관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역사관 안에 그 인물의 세계관이 있고, 인물 간 세계관이 충돌하면서 그 갈등이 서사를 이루거든요. 주인공의 욕망에 대한 구체적 세계관이 있어야 하고, 그걸 위해서는 자신만의 뚝심 있는 역사관이 꼭 필요합니다.

 

 

사진 4. 영화 <사도>·<동주> 등 많은 역사영화를 제작하신 이준익 감독님


사극 드라마를 보면서, '사극은 역사가 스포일러'라고 투덜거렸던 지난날의 저 자신이 생각납니다. 인물의 생사도, 전쟁의 결과도 제가 아는 대로 흘러갈 거니까요. 하지만 역사콘텐츠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과나 인물의 생사 여부가 아니었습니다. 해당 콘텐츠 속에서 어떠한 맥락으로 인물과 사건이 표현되었는지,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울림을 줄 수 있는지, 더 넓은 시각으로 콘텐츠를 대해야 하는 것이죠. 이날 사회를 맡아주신 맥스무비 박혜은 편집장님 역시, "인간이 살고 죽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이야기 속에서 긴 생명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두 사람의 콘텐츠"라고 표현했는데요. 역사 속 인물들이 콘텐츠 속에서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것은 창작자들의 끊임없는 탐구와 진정성 덕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하루였습니다.

 

하나 더! 이날 개최되었던 <역발상 토크콘서트>는 컬처링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풀버전이 공개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현장 분위기가 궁금하시다면 페이스북 페이지 "컬처링"을 주목해 주세요!

 

사진 5. 역사문화포털 "컬처링" 홈페이지.


홈페이지를 통하여 방대한 역사 자료, 콘텐츠 활용사례 등을 찾아볼 수 있고, 창작컨설팅도 받을 수 있다.

 

사진 출처

표지사진. 페이스북 페이지 "컬처링"

사진 2, 3, 4. 써스포 영상취재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