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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 마침내 도래한 ‘아시안 웨이브’

by KOCCA 2019. 1. 30.



할리우드에서 동양은 언제나 주변부에 머물러왔다. 동양인 배우가 주연을 맡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어렵사리 등장하더라도 줄거리 속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대부분의 경우 동양인 단역들은 우스꽝스럽고, 소심하며, 경쟁심이 강하고, (많은 경우) 공부를 잘하는 동양인 스테레오타입에 꼭 들어맞는 장식품으로 활용되곤 했다.


미국의 화이트워싱 관행은 최근까지 계속됐다.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실사 영화에서 원작 일본인 주인공 배역에 스칼렛 요한슨이 기용된 것 이 최근 사례다.


심지어는 마땅히 동양인이 맡았어야 할 배역을 당연하다는 듯 다른 인종에게 빼앗기는 경우도 많다. 20세기 초반에 처음 시작된 할리우드의 이른바 ‘화이트 워싱’(백인이 아닌 배역을 백인 배우에게 맡기는 일)관행은 아직도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실사화 영화에서는 원작의 일본인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 역에 백인인 스칼렛 요한슨이 캐스팅되어 빈축을 샀고 그 이전에는 마블 원작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티벳 고승의 역할을 백인 배우 ‘틸다 스윈튼’이 맡아 논란이 됐다.


근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마블 영화에서도 화이트워싱은 있었다.

<닥터 스트레 인지>에서 백인 여배우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에인션트 원’은 원래 티벳인이다.


이런 동양인 배역 축소 현상은 ‘영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백인이 꼭 필요하다’는 할리우드의 오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공각기동대’ 실사판 영화의 화이트 워싱이 반발을 일으켰을 때 헐리우드 각본가 맥스 랜디스는 브이로그를 통해 “불행한 일이지만 예상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며 “현재 할리우드에는 국제적인 수준의 인지도를 가진 일류(A-list) 아시안 여성 배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평했다. 할리우드 내 동양인 배우들의 기회 부족 문제는 최근 에미상 여우주연상에 ‘아시아 최초’로 노미네이트된 한국계 배우 ‘샌드라 오’의 사례에서도 두드러진다. <그레이 아나토미>로 유명세를 탄 샌드라 오는 드라마 <킬링 이브>로 에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에미상 69년 역사상 아시아 배우가 주연상 후보로 이름을 올린 것은 이번이 최초다. 샌드라 오는 이전에도 드라마 부문에서 에미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다섯 차례 오른 바 있으며,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한 적도 있는 30년 경력의 실력파 배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 직전까지의 그의 할리우드 커리어는 퍽 단조로웠다. 지난 4년 간 샌드라 오는 소규모 독립영화에 출연하거나 조연을 맡거나 웹시리즈에 등장하거나 성우 연기를 하는 등, 주류 무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해왔다.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 에미상 등 여러 시상식에서 동양인 출신의 배우나 제작자가 자주 후보에 오르내리지 못하는 것을 수여자들만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헐리우드 전반에 걸쳐 동양인 주요 배역이 아예 존재하지 않아왔기 때문이다. 미국 바이올라 대학교에서 사회학대학 학과장을 지내고 있는 낸시왕 유엔 교수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양인 배역은 아예 만들어지지 않거나 주변부에 머물기 때문에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들은 일류로 등극할 만한 기회가 원천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여성으로 한정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는 “1,100개의 인기 영화에서 드러난 불평등 현상”(Inequality in 1,100 Popular Films)이라는 논문에서 “2017년에 인기를 끈 상위 100편의 영화 중 여성이 주연을 맡은 영화의 수는 33편이었고, 그 중 백인 아닌 배역은 4편에 그쳤다.”며 “대규모 자본으로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에서, 통상적으로 ‘과소하게 대표돼 온’(underrepresented) 인종 출신의 여성 배우에게 허락된 핵심 배역은 매우 적었다”고 전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미국에서 단순한 영화 이상의 사회적 의의를 가진 작 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할리우드의 해묵은 분위기를 고려하면, 지난 8월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2018년 8월 15일 개봉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흥행 수입은 첫 주에만 3,500만 달러였다. 로맨틱 코미디로서 지닌 저력과 재미를 인정받으며 이후로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기도 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싱가폴 출신의 미국 유학생인 주인공이 싱가폴로 돌아가 겪는 사건들을 다룬 영화다. 당연히 모든 배역은 동양인 배우들이 맡았다.


감독 존 추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통해 동양 배우들의 입지를 넓히고자 노력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배우들에게 직접 연락해 오디션 영상을 보내라고 얘기했었다. 배우 캐스팅 과정을 최대한 오픈하자는 게 우리가 공통적으로 지닌 생각이었다. 그런(신인) 배우들, 특히 여러 동양 배우들에게 있어 배역을 얻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잘 있기 때문이다.”고 밝힌 바 있다.


존 추는 더 나아가 이번 영화가 “단순히 영화가 아닌 하나의 사회운동(movement)”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일개 영화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가도 현지의 상황을 고려하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동양인만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는 1993년에 개봉한 <조이 럭 클럽>이 마지막이었다. 무려 25년 간 비슷한 유형의 메이저 영화가 없었다는 사실은 이번 영화를 유독 소중히 여기고 있는 동양계 미국인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해 준다.



여러 맥락을 고려했을 때, 미국 현지 동양인들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 바치는 관심을 그저 영화 자체에 대한 애정과 존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들이 해당 작품을 두 손 들어 반기고 있는 것은 이 작품이 ‘동양계 영화는 성공할 수 없다.’는 할리우드 여러 경영자 및 제작자들의 선입견을 무너뜨리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출신 성분’이 강조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기만 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 깊이 고민해볼 만하다. <크레이지 리치아시안>이 유명세를 탈 수 있었던 것은 동양 영화라는 뿌리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을 각색한 이번 작품이 만약 로맨틱 코미디가 지녀야 할 기본적 완성도를 갖추지 못했었더라면 이 정도의 인기를 끌지는 못했으리라는 것이 미국 안팎 영화 평론가들의 중론이다.


그럼에도 ‘아시안’이라는 타이틀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사회운동’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다는 이유로 과도하게 추앙되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지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보기 드문 동양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영화의 작품성과 의의가 과대평가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완성도는 높을지 모르나 ‘막대한 부를 가진 사람들의 로맨스’라는 진부한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분석이나, 싱가폴 인구 구성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말레이, 인도 계열 인물들의 비중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 등은 가볍게 넘어가기 힘들다.


더불어, 영화 자체의 훌륭함에 대한 논의보다도 동양계 영화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종차별의 한 형태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인의 개성에 집중하지 않고 그들의 ‘소속’만 강조하는 것은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의 가장 보편적 정의 중 하나다.


<서치>는 동양인 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웠지만 영화 안에서 인종적 담론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또 다른 동양인 주역 영화로서 비슷한 시기에 적지 않은 성공을 기록했지만 인종적 캐치프레이즈를 전혀 내세우지 않았던 <서치>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한국계 배우 존 조의 출연과 더불어 탄탄한 서사, 독특한 연출이 화제를 모으며 한국에서 유독 더 많은 인기를 끈 영화 <서치>는, 한국계 이민자의 삶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으면서도 영화 어느 곳에서도 인종적 담론을 끄집어내지 않는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인종 융화의 가장 바람직한 형태일 수 있다. 주인공들이 동양인이라는 사실은 ‘따로 언급될 필요조차 없는’ 자연스러운 일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연 배우 존 조 또한 본 작품의 ‘아시아 영화로서의 가치’에 대해 동일한 소견을 밝힌 바 있다. 현지 연예 매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와 함께 온라인으로 진행한 시청자와의 대담에서 존 조는 “내가 <서치>에 관해 좋아하는 한 가지 사실은, 이 영화가 마치 (좀 더 진보된) 미래에서 온 영화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지금 현재도 우리(시청자와 본인)는 이 영화가 얼마나 ‘동양인을 대변하고 있는가’(representation)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그게 그저 당연한 일인 것처럼 아예 논하지 않는다.”면서 “<서치>는 아시아계 가족, 그 중에서도 한국계 가정을 특정해 다루지만 그 설정은 이야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종차별 타파의 최종단계(endgame)를 보여주는 예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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