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상발전소/칼럼 인터뷰

[신정아 작가의 컬쳐멘터리] "모든 장소는 시간의 이름이다"

by KOCCA 2017. 11. 3.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문화 관련 키워드 중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이 있다. 관광객을 의미하는 투어리스트(Tourist)’와 지역의 상업화로 월세나 임대료가 올라 본래 거주하던 주민이 쫓겨나는 현상을 의미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합성어다. 주거지가 관광지화되면서 주민들이 떠나는 현상을 뜻한다. 무분별한 관광객들의 촬영과 소음에 지친 벽화마을 주민들이 검은 페인트로 벽화를 지운 이화동, 관광객들로 삶이 파괴된 나머지 해마다 100가구씩 마을을 떠나고 있는 북촌 한옥마을 등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곳이 누군가의 집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서울 종로구 창신동 쪽방촌 주민의 성토가 실린 인터뷰를 읽었다. 일명 쪽방촌 출사가 유행하면서 1960~70년대 풍경이 남아 있는 공간으로 이곳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집이 어떤 곳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의 눈치 안 보고 누울 수 있는 곳, 어떤 모습으로든 마음 편히 돌아다닐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다. 대문 밖 세상에서 감당해야 하는 속도와 경쟁, 좌절과 수모를 다독이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갈 힘을 얻는 곳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의 삶을 받쳐주던 따뜻하고 정겨운 골목들이 낯선 이들의 관광 코스가 되면서 평온했던 개인의 공간들은 누군가의 호기심과 추억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되고 있다. 속옷을 입고 거실을 활보하고, 다 먹은 라면 냄비를 머리맡에 밀어 두고 TV를 보고, 빨래를 널면서 멍하니 하늘을 보는 모든 일상이 누군가의 렌즈에 담겨 추억 팔이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기계 뒤에도 사람이 있고 기계 속에도 사람이 있다. 내가 버린 쓰레기도 사람이 치워야 하고 내가 만들어내는 소음도 귀가 들어야 한다. 골짜기에 댐을 막으면 사람의 집이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개펄에 둑을 쌓으면 그만큼 사람의 생명이 흙 속에 묻힌다. 사람은 큰 집에서도 살고 작은 집에서도 살고 집이 아닌 것 같은 집에서도 산다.      

                                                                                 -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중에서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2012년 작고한 건축가 정기용의 마지막 1년을 기록한 영화다. 정기용은 건축가들이 인정하는 공공 프로젝트 전문가였다. 공공건축을 통해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주민들의 삶을 파괴하지 않는 건축이었다. 그가 10여년 간 참여했던 전북 무주 공공 프로젝트는 주민을 위한, 주민을 향한 건축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미지 출저 네이버 영화 <말하는건축가>

 

영화의 첫 장면에서 정기용은 무주군 공설운동장을 찾아간다. 예전부터 공설운동장은 주민을 위한 시설이지만 정작 이곳에서 열리는 행사에 초청받은 주민들은 참석율이 저조한 아이러니의 공간이었다.

 

우리가 미쳤나! 군수만 본부석에서 비와 햇볕을 피해 앉아 있고 우린 땡볕에 서 있으라고 하는 게 대체 무슨 경우인가. 우리가 무슨 벌 받을 일 있나? 우린 안 가네

 

주민의 불평을 전해들은 군수의 제안으로 정기용은 운동장 주변에 주민을 위한 등나무 집을 설계한다. 군수가 조경용으로 심어두었던 240그루의 등나무가 주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주면서 멋진 조경을 연출할 수 있도록 파이프를 이용해 자연의 지붕을 만든 것이다. 등나무가 편안하게 타고 오를 수 있도록 파이프의 각도를 조절하고, 스탠드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에 장애가 없도록 꼭지점을 잡았다. 이후 등나무의 집은 사람들에게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늘이 되어주었고, 지역의 명소가 되어 다양한 문화행사의 무대가 되었다



이미지 출처 - EBS 지식채널e 799<건축가 정기용 편>

 

영화 속 정기용은 주민의 삶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건축가다. 경청은 진정한 건축에 대한 사유와 실천을 위한 작업의 과정이다. 그의 경청이 만들어낸 인상 깊은 건축이 안성면 주민자치센터이다. 과거 행정기관이었던 면사무소를 주민자치센터라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고 그는 주민들에게 어떤 시설이 필요한 지 물음을 던진다.

 

면사무소는 뭐 하러 짓는가? 목욕탕이나 지어주지

 

주민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안성면에는 목욕탕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목욕을 하러 봉고차를 빌려 대전까지 간다고 했다. 정기용은 자치센터 1층에 공중목욕탕을 설계했다. 소도시의 주민 수를 고려하여 목욕탕의 규모를 작게 하고 홀수날은 남탕, 짝수날은 여탕으로 정해 번갈아가며 사용하도록 했다. 중요한 행정처리가 아니면 찾아갈 일 없던 면사무소는 목욕탕이 생긴 이후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목욕탕 옆에는 보건소를 두어 주민들이 가장 필요한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미지 출처 - EBS 지식채널e 799<건축가 정기용 편>

 

서로에게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서로 알몸이 되는 편안함, 그것은 목욕탕이라는 프로그램만이 공동체에 선사할 수 있는 선물이다” - 정기용, <감응의 건축> 중에서

 

정기용은 진정한 건축이란 사람들의 삶을 보살펴주는 배려라고 말한다. 그는 획일화된 근대의 도시공간들이 빼앗아 간 일상의 다양한 풍경들을 가슴 아파하고, 비판한다. 망각과 단절의 역사로 이어진 도시공간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도구화하고, 상업화해왔기 때문이다.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며, 그것은 사람과 식물들에 의해 헤아려지면서 가능하게 된다

                                                                                - 정기용, <감응의 건축> 중에서 



시간은 무수한 경험과 이야기의 연속이다.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이 침묵의 공간을 따뜻하고 애잔한 또는 외롭지만 그리운 장소로 만들어준다. 영화 <말하는 건축가>는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발전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공간의 의미를 되새겨준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진정한 거주의 조건을 성찰했던 건축가 정기용. 그가 들려주는 건축 이야기는 젠트리피케이션, 투어리스티피케이션 등으로 타의적 유목민이 되고 있는 도시인들에게 잔잔한 위로와 힘을 건넨다.

 

모든 장소는 시간의 이름이다. 모든 장소는 너의 이름이다.

- 이광호,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