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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스토리

미지의 세계로 가는 ‘문’ : 지하실에서 컴퓨터까지

by KOCCA 2015. 1. 30.


 

 

- 상상발전소 기사 공모전 수상작 / 백소담 - 


‘현실 바깥의 세계’는 오랜 세월 동안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어왔습니다. 고대 신화에서부터 인간은 항상 높은 산꼭대기나 깊은 바닷속처럼 인간이 도달하기 힘든 장소에 미지세계라는 환상을 그려냈습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중세 대항해시대가 열린 뒤에는 탐험가들이 꿈꾸는 ‘바다 건너편의 세상’이야말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지세계였고, 지금도 우리는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보물섬 이야기나 엘도라도, 아틀란티스 등에 관한 모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현대에 들어 과학과 탐험기술이 발달하자 인류는 이제는 지구 위에서 미지의 세계를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최후의 개척지인 우주, 혹은 감각을 벗어난 ‘차원’이나 ‘시간’의 개념으로까지 이동했고, 이는 그대로 콘텐츠의 중심 소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현대나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만화, 소설 등에서는 보물섬이나 야생 원주민의 이야기 대신 우주, 시간 여행, 차원이동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게 됩니다.


이렇듯 미지의 세계가 ‘지구에는 없는 세계’가 된다면 어떻게 그 세계로 들어가느냐에 대한 문제, 즉 ‘문’을 찾아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에 대해 영화 <인셉션>이나 <아바타>처럼 인간의 의식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유형의 물건을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경우 역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판타지 연작 소설 <드룬의 비밀>이나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그리고 만화 <이누야샤>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각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문들의 형태를 가만히 살펴보면 특정 시대나 문화의 상상을 담은 원형들이 다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사진1 영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에 등장하는 옷장 



소설 <드룬의 비밀>에서 주인공들은 집의 지하실에서 발견한 비밀 계단을 통해 ‘드룬’이라는 환상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나니아 연대기>는 집에 있던 낡은 옷장이 문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만화 <이누야샤>에서는 전 시리즈를 통틀어 주인공의 집 사당에 있던 오래된 우물이 현대와 일본 전국시대를 연결해줍니다.

 

 


▲ 사진애니메이션 <이누야샤> 시리즈에 등장하는 ‘뼈 먹는 우물’ 



주목할 만한 것은 각자 다른 사물인 지하실 계단, 낡은 옷장, 오래된 우물이 어떻게 모두 ‘문’의 상징적인 원형으로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세 작품에 등장하는 ‘문’들의 공통점은 모두 어둡고 음침한 이미지를 지녔으며 무엇보다도 집 안에, 그것도 집의 중심이 아닌 변방 혹은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둡고 음침한 이미지는 “저 안에 뭔가 숨어 있을 거야.”라는 상상을 자극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낡은 옷장이나 오래된 우물의 경우 영화 <컨저링>에 등장하는 장롱 귀신, 그리고 <링>의 우물귀신으로 유명한 ‘사다코’를 떠올렸을 때 어쩌면 공포스럽고 신비로운 이미지는 이미 두 원형 안에 깊이 내재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 사진3 영화 <사다코 3D>의 한 장면

 

 

▲ 사진4 영화 <컨저링> 포스터



한편 세 작품의 ‘문’들이 모두 집 안에 있는 점은 이전의 미지세계 이야기들과 비교하면 중요한 차이점을 던져주는데, 그건 바로 주인공들이 현실과 미지세계 사이를 언제든 자유로이 오갈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중세 배경의 탐험 이야기에 등장하는 바다 건너 세상이나 깊은 땅속, 혹은 바다 밑 세상의 경우 물리적인 접근 자체가 어려워서 그 성격도 일시적인 모험의 공간에서 그치고 맙니다. 이를테면 현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아득한 지구 중심세계를 모험의 무대로 삼은 영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가 그러합니다. 하지만 지하실 계단이나 우물처럼 일상적 접근이 가능한 곳이 문이 될 경우 ‘미지의 세계’는 말 그대로 제 집 안방 드나들듯 접근하기 쉬운 공간이 됩니다. 따라서 작품 속 주인공들은 미지세계에서 일회적인 모험을 한다기보다 오히려 또 하나의 삶과 정체성을 경험하며, 현실과 미지세계 사이에서 소위 ‘이중생활’의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실제로 현대를 배경으로 한 콘텐츠에서는 현실과 미지세계를 오가는 이중생활이 이야기를 이끄는 장치로서 자주 활용됩니다.


한편 1990년대에 들어 현대 사회의 미지세계 이야기 중에서도 아주 신선한 콘셉트가 처음 등장하는데, 바로 애니메이션 <디지몬 어드벤처>가 선보인 ‘사이버 공간 모험’ 이야기입니다. 당시 ‘월드 와이드 웹(WWW)’이 확산하자 인터넷을 통한 이메일, 게시판, 대화방 등의 통신 서비스가 성장했고, 더불어 이메일을 통해 전파되는 매크로 바이러스의 등장은 “컴퓨터도 병에 걸린다.”라는 걸 처음 일깨워준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사이버 공간에 대한 인식이 대중들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했으며 특히 매크로 바이러스의 존재는 사이버 공간을 헤집고 다니는 ‘악한 존재들’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 사진5, 6 애니메이션 <디지몬 어드벤쳐>



컴퓨터라는 단말기는 사용자를 사이버 공간과 연결해주는 창구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컴퓨터는 낡은 옷장과 우물에 이어 자연스럽게 사이버공간이라는 미지세계로의 상징적 ‘문’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본체나 모뎀이 아닌 모니터가 작품에서 실질적인 문 역할을 하는 이유는 모니터의 시각적인 이미지가 비교적 문과 창문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나니아 연대기>의 주인공 루시가 옷장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가듯 <디지몬 어드벤처>의 주인공들이 컴퓨터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유명한 장면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시대마다 인류가 상상해온 미지의 세계는 곧 그 당시의 인류가 물리적으로 도달하지 못한 공간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 우주와 시간 여행, 차원이동이 자주 등장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다만 현대의 미지세계가 거친 파도와 고달픈 시련을 뚫고 도달하는 모험의 공간 대신, 또 하나의 삶의 공간이 된 것은 주목할 만한 특징입니다. 이는 곧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또 다른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를 이용한다면 이질적인 정체성을 동시에 지닌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사진 출처

- 표지 월든 미디어, 브에나비스타코리아

- 사진1 월든 미디어, 브에나비스타코리아

- 사진2 요미우리 TV

- 사진3 오퍼스 픽쳐스

- 사진4 뉴 라인 시네마

- 사진5,6 도에이 애니메이션